diary back memo guest
   
ɴ
   

 

"살아갈 의지가 있다면 어디라도 천국이 돼…

 왜냐면 살아있으니까…

 행복해질 수 있는 기회는 어디에라도 있어."

write 230611

2023.06.11 02:51 # reply

 

 

 

 악의를 담은 행동은 사람을 상처입힌다. 의도가 있건 없건 악의로 해석되는 순간부터, 행동을 받아낸 당사자의 인식을 배제하며 이루어지는 이 행위는 비가역적이다. 인간을 의태한 살결에선 이제 익숙한 바디워시의 향이 묻어난다. 그는 거기에 얼굴을 묻고 어둠 속으로 잠겨들었다. 침묵을 유지하는 와중에도 내면은 서늘했다. 멍청하게 굴어. 아니면 기억력이 나쁜 건지. 


 제법 규칙적으로 머리카락을 쓸어넘기고, 가닥의 틈새로 손가락이 스치고, 두피를 매만지는 손 끝, 언뜻 차가운 손바닥이 귓가를 스친다. 그가 입힌 상처를 기억한다면. 당시의 반응은 상당히 매서웠던 것을 돌이켰다. 죽지 않으니 적당히 마음을 회유하려는 것 치곤 여전히 쌀쌀맞아,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남자는 몇 가지 가능성에 따른 여자의 반응을 헤아리고, 그에 따라 다시 흉터를 헤집을 방법을 획책하고, 파기하며 무료한 시간을 좀먹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남는 방법 하나 없이 모두 타들어 갔다. 이 여자는 번거롭게 굴고, 때론 죽으려 들고, 자신의 분노를 견디지 못한 것처럼 사로잡히기도 했다. 어느 때에는 고작 몇십 년을 살아온 그보다도 미숙한데, 이런 순간에는 아주 오랜 시간을 견뎌내는 법을 배운 것도 같았다.

 

 육신을 헤집고 들쑤셔도 처음만큼은 상처입힐 수 없다니, 그래서 방법을 모두 잃어버린 게 분명하다. 그는 알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여자의 심장 가까이에선 파도 치는 듯한 맥박이 균일하게 밀려오는데, 그는 인간의 거죽 너머에 숨은 것을 실제로 쥐어 손바닥 전체로 그것을 이미 체감해본 적이 있으면서도 생경하게 숨을 죽였다. 따뜻해질 줄 모르는 손이 풀어헤친 긴 머리에 잠시 닿았다 다시 그의 정수리를 부드럽게 덮고, 곱슬진 가닥을 타고 흐른다. 지리멸렬한 순간이지 않은가? 그는 겪어본 적 없는 평온을 자신의 것이라 받아들인 적이 없어, 이 순간의 무게를 낯설게 생각했다. 함께 잠들던 이들은 불온하게 허덕거리는 맥박을 쥐곤 했고 그것은 이젠 없는 동생 하이옌도 마찬가지였다. 그 애는 어렸고, 이렇게, 그가 끌어안고 잠들곤 했는데…


 …문득 남자는 마치 외부의 그 무엇으로부터도 자신을 보호하려는 듯이, 그러나 그 보호에 타인을 수반하려는 듯이 어둠 속을 더듬거리며 여자의 몸을 끌어안고 커다란 몸을 웅크렸다. 잠시 흠칫 멈추었던 여자의 손이 아까보다는 느리게, 다시 남자의 머리 위로 내려앉을 무렵, 그는 이 여자가 자신이 남긴 악의를 모두 잊어버리고 고작 이런 행위에만 익숙해져도 나쁘진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다시 상처입힐 수 있겠지, 이번의 흉터는 대단히 크게 남아서, 몇날 며칠이 지나도 피를 뚝뚝 흘리며 달아나고, 그러면 그 뒤를 좇아 다시 길들이고… 그런데, 글쎄… 어째서인지 그게 당장은 그토록 구미에 당기지 않는 걸까. 여자의 척추와 날개뼈는 선명하게 도드라져 손 끝에 걸리고, 남자는 여자가 이토록 작고 메마른 몸을 웅크리며, 아니, 그 너머의 뼈대를 굽히고 접어 호소할 줄 모르는 고통에 울부짖다 기어코 무언가 파괴할 것을 이어 떠올렸다. 그리곤 다시 한 번 모든 악의적이고 단편적인 파괴에 대한 망상을 재 한 줌 남기지 않고 파기했다. 역시, 이대로가 차라리 나았다. 여자의 손 끝은 차츰 속도를 잃고 느려져, 그의 머리카락에 사로잡힌다. 곧 파도를 따라 여자의 숨소리가 머리 위에서 규칙적으로 쏟아졌다.

 

 

 타오옌은 이토록 낯설고 무료한 순간도 존재할 수 있고, 그리고 그가 무시당해 마땅한 이방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마침내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그 날 꿈에서 남자는 바닷가에 앉아 하염없이 그의 발목을 적셔오는 물결을 바라보았지만 악몽이 되지 못해 기억에 오래 잔존하지도 못했으며, 얼마 되지 않아 아주 오래도록 그의 것이 된 적 없었던 꿈 없는 밤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write 230609

2023.06.09 11:02 # reply

데릭리안

로판…? AU

 

 

애당초 그 남자에 대한 소문은 어느 하나 좋은 것이 없었다. 갑작스레 나타난 길거리 출신의 후계자, 누구와 붙어먹었을지 모르는 태생, 본래 저택에 머무르던 형제가 휘말려 죽었다지만 비루먹은 개만도 못한 놈이 남모르게 죽였을 게 뭔가? 욕망이란 그런 법이다. 게다가 웬 메이드를 애첩으로 끼고 살며 호화스러운 드레스며 장신구를 안겨주지 못해 안달이라니. 고상한 귀족 사회에선 좀처럼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추문의 연속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훤칠한 남자의 이목구비며 외척이라곤 없는데다 고작 애첩 하나, 잘 집어삼키면 그만한 이득도 없으리라 판단되었다. 간헐적으로 넌지시 조건부의 혼약을 제시하는 편지들이 저택에 날아들었는데, 리안테의 귀로 수락에 관한 이야기가 흘러들어가는 일은 없었다. 남자는 수월하게 '애첩'에게 프로포즈했고, 그가 아니면 안 된다는 말로 상대를 자신의 옆에 단단히 사로잡았다.

결혼식은 성대하게 차려졌고, 결혼식에 참석했던 이들에게는 이국의 왕녀를 데려왔다는 소문이 돌았다. 풍성한 흰 드레스와 겹겹이 깔아 길게 늘어진 면사포는 그 길이만큼이 신부의 행복을 증명한다는 비논리적 미신을 어떻게든 현실로 공고히 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희미한 흰 빛 아래 드러날 듯 말 듯한 가냘프고 날카로운 턱선과 가느다란 목, 틀어올린 푸른빛의 머리카락, 장갑 너머로 뻔히 비치는 대리석을 깎아둔 듯한 아름다운 손, 성씨는 불분명했지만 이토록 눈부신 대상 앞에서는 인세의 많은 것이 힘을 잃었다. 남자를 향한 추문도 따라서 숨을 죽였다.

대신 실은 메이드를 총애한 것이 아니라 메이드로 신분을 위장한 왕녀를 보호하려던 것이었으며, 친족의 죽음은 그토록 아름다운 신부를 정당하게 맞이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을 한 것이뿐이라든지, 떠돌던 시절은 길거리 뿐이 아니라 어디 용병 집단에 들어가 험난하게 전쟁터를 굴렀음이 분명하고 그 당시에 저 아름다운 왕녀를 만났던 것이 아니냐는 헛소문이 신나게 부피를 키워갔고 당사자들은 구태여 부정하지 않았다. 실제 신분을 증명하려는 몇 가지 시도는 있었으나 때로는 낭만이 현실을 압도하는 법이었다.

230603

2023.06.03 18: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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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01 13: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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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31 01: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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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26 17: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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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30 19: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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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26 17: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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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20 12:14 # reply

마피아AU

 

 

 

젊은 나이의 카포가 값을 부르자 일순간 경매장이 고요해졌다.

 

곧 바이올린에 관심이 있어보이지는 않았는데, 하는 종류의 웅성거림이 알음알음 돌았다. 글쎄요, 최근에 바이올리니스트 하나가 실종되긴 했죠. 좋은 연주를 하는 사람이었는데. 견진성사가 이루어지진 않았으니까요. 적대관계와 얽히지 말라는 단순 위협 목적이라고 생각했어요. 확실히 그 쪽에서 발을 빼긴 했었죠. 약혼도 그냥 말만 나왔던 거라고 말을 물리고, 단순히 파티에서 얼굴이나 스쳤을 뿐이라고. 하지만 아직도 돌려보내지 않은 걸까요? 어쩌면 모종의 '손상'이 생겼을지도 몰라요. 하긴, 난폭한 인간이죠, 저 젊은 카포는. 그런 이야기들 사이에서 카포는 생각보다는 비싼 값에, 하지만 경매장의 입장에서는 예상보다 낮은 가격에 아름다운 바이올린을 소유했다. 볼트로 돌아가는 걸음은 경쾌했다.

 

 

 

"당신 같은 걸 위해 연주하진 않아."

싸늘한 답변이었다. 가져온 바이올린을 침대 위에 올려둔 남자는 조금 난처한 표정으로, 몸을 숙여 자신의 소유물과 눈을 마주쳤다. 차갑고 축축한 지하실도 아니고, 침실에선 기껏해야 발목 정도를 묶어둘 뿐이다. 식사는 꼬박꼬박 제공되었다. 상한 음식은 없었고, 필요 이상으로 손을 올리지도 않았다.

 

"왜? 전엔 연주해주겠다고 했으면서."

"헛소리... 기억 안 난다고 했을 텐데."

"자꾸 그럴 거야?"

 

손을 뻗어 마른 어깨를 짚자 잔뜩 경계하고 있었는지 몸이 순간적으로 튀어올랐다. 남자는 천천히 손을 미끄러트려 팔을 잡았다.

 

"나도 많이 봐주고 있어."

 

덜덜 떨리는 몸을 힘으로 반듯하게 세웠다. 그러고도 남자보다 머리 하나는 작았다. 때린 적도 몇 번 없는데, 그렇게 얻어맞은 곳보다도 유독 팔이며 손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섬세한 손이다. 사람을 죽여본 적 없는 손. 남자는 흠집 하나 없는 부드러운 손을 천천히 쓸어주었다. 손톱은 언제나 단정하게 관리되고 있다. 엄지로 부드러운 손바닥 살을 꾹 누르자 떨리던 눈이 그제서야 남자를 마주쳤다.

 

"그렇지. 이제 잘하네? 근데 아깐 왜 그랬어."

"너..."

"리안, 아직도 연주하기 싫어?"

 

슬쩍 손을 놓자, 떨리던 몸에 힘이 실렸다. 청록색 눈이 창가를, 남자가 열고 들어온 문의 건너편을 스쳤다. 뿌리치고 도망치려는 것이다. 불가능한 시도인 것을 알면서도. 남자는 목적을 이루지 못했지만 조금 유쾌해졌다.

 

남자의 작은 볼트(;가장 중요한 재산 따위를 숨겨놓는 금고. 은신처에 가깝다.)는 엄중하게 관리된다. 이 젊은 카포는 결코 외부인에게 그 볼트의 방문을 허락하지 않는다. 비슷한 구조, 비슷한 형태의 집 사이에서 위치는 쉽게 교란된다. 탈출한대도 목적을 이루지 못할 것은 뻔하다. 

 

 

 

젊은 카포의 볼트; 넓은 침실, 두 개의 욕실과 주방, 2층까지 있는 지하실, 사람이 빠져나가기 좋은 큰 창, 잠겨있는 작은 방, 거실. 언제든 도피할 수 있는 가짜 신분증과 여권, 약간의 현금, 한 줌의 보석, 비상발전기와 권총 다섯 정, 칼 두 자루, 바이올린 세 대, 커다란 그랜드피아노 한 대, 

그리고 아름다운 바이올리니스트 하나.

write 230417

2023.04.19 15: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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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ote 230418

2023.04.18 17:52 # reply

분명 누군가는, 나보다도 선명한 감정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순간 여기에 있는 건 나였다.

내가 아니면 안 됐다.

write 230329

2023.03.29 15:15 # reply

현대 AU

 

 

 

알아주지 않으면 안 되냐고, 이 마음에 대답해달라고 온 몸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오랜 시간을 자신을 기억하며 기다려왔다면, 지고지순한 눈이 싫지 않았다면, 시간과 공간을 할애하고 기꺼이 이 삶을 침범하게 뒀다면, 그리고 마침내 그가 좋아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한다면.

 

자신이 무엇을 해왔는지 아는 이라면, 그 말을 거역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조차 모를 수 없었을 것이다. 비가 쏟아지고 있다. 한 때 어떤 고백은 그가 허용하기에는 지나치게 무거웠고, 어떤 고백은 지나치게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첨예한 극단에 선 이 순간에, 그만큼 날카로운 목소리가 자신을 매섭게 찔러들었다. 더 이상 모르는 척할 수도, 대수롭지 않게 흘려넘길 수도, 어깨를 잡아주는 것으로 멈출 수도 없었다. 하늘은 흐렸다. 이미 그러고 있잖아, 라는 말에 돌아온 것은 다르다는 확언이다. 외면으론 해결할 수 없었다. 이윽고 리안의 목소리는 점차 힘을 잃어갔다. 책임이라도, 아니, 사랑한다고 말해주면, 조금만 더 좋아해주세요. 약간의 침묵, 이윽고 떨리는 목소리가, 옆에 있게만 해줘요, 하고, 마침내 가라앉았다. 그러나 찔린 자리는 여전히 선명했다.

 

애석하게도 리안은, 클레안데르는 가진 많은 것을 확고하게 신뢰하면서도 데릭 자신에게 끼친 영향만은 도무지 믿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무엇을 해왔는지, 어떤 것을 줬는지, 무엇을 붙잡게 되었는지, 알고 있다면.

 

"리안?"

 

눈이 이토록 떨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 것도 모르고, 그렇기 때문에 두려워하고 있다. 비가 아닌 눈물로 젖은 얼굴이었다. 우산을 놓쳤는데도 그것만은 분간이 됐다. 이토록 쏟아지는 비 아래에서는 애초에 소용 없는 물건이었다. 달아나기에는 한적한 골목, 피로에 지친 두 다리. 여기 남아야 하는 이유는 수없이 많고, 리안을 두고 가야만 하는 이유도 없다. 데릭은 허탈하게 웃었다. 종착역이다. 거역할 수 없는 마음을 수용한 것은 이미 과거의 일이었는데도.

 

마찬가지로 젖은 손으로 그의 얼굴을 쥔다. 이 순간까지도 청록의 눈에 확신은 없다. 배운적 없어 말로는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배웠다 한들 입 밖으로 좀처럼 꺼낼 수 없었을 것이다. 입술이 맞닿으면 약간 짠 맛이 났다. 

 

"울지 마."

 

다시 한 번 입술을 겹치고 말한다.

 

"옆에 있어."

 

가볍게, 떨린 적 없던 목소리가 내려앉는다. 입술과 입술의 틈새를 혀로 훑고 파고든다. 젖은 숨을 집어삼키면서도 눈을 마주친다. 감지 마, 도망치지 않을게. 호흡은 교차하고, 단정한 치열을 넘어 혀와 혀가 얽힌다. 너는 나를 좋아하지. 몇 번이나 다친대도, 내가 떠나버린대도, 옆에 있어주지 않았대도. 어쩔 줄 모르는 손이 간신히 자신의 어깨에 닿는다. 다치지 마, 떠나지 않을게. 옆에 있을게.

 

그러니 너도 여기 있어.

230321

2023.03.21 09: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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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 230320

2023.03.20 14:10 # reply

현대au

 

 

 

촛불 사이에서 일렁이는 눈동자를 알고 있다. 청록색 눈동자는 빛이 서리면 오묘한 색으로 반짝인다. 달리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다면, 데릭은 그 눈을 마음이라고 부르고 싶었다. 달작지근한 향이 묻어나는 케이크, 기대가 넘치는 미소, 6월 3일 늦은 오후의 일이었다. 저녁식사로 무엇을 먹었는지, 둘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에 대해서는 기억이 불분명하다. 선명한 것은 그 눈. 그는 처음으로 그 날을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이제껏 인지하지 못했고 그래서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리안은 어쩐지 기대하는 눈으로 포장된 선물을 내밀었고, 데릭 자신의 말에는 발등을 가볍게 밟으며 실망을 토로했다. 남자는 그 때부터 비로소 타인의 생일을 날짜 그 이상으로 인지했다.

 

생일은 그저 태어난 날일 뿐이었다.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축하받아야 한다면 이 세상엔 축하할 게 너무 많지 않은가?애초에 그런 것이 없이도 삶에 큰 문제가 없었다. 삶은 살아가는 것에 의미가 있다. 살아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으므로. 그러나 리안은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을 기뻐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생일을 챙기고,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던 것이다.

 

데릭은 타인의 의미에 운운하는 종류의 인간은 아니었지만, 그 상대가 자신을 잊지 않고 기다리고 또 반겨주는 사람이라면 조금 달랐다. 이래서 다르다니까, 하고 생각하면서도 그는 이제껏 물어본 적 없었던 상대의 생일을 확인하고, 이미 그 날이 지나버렸다는 것을 알고 약간 얼떨떨해졌다. 

 

"왜 말하지 않았어?"

"그야… 당신은 잘 안 챙기잖아요, 그런 거."

"넌 좋아하잖아."

 

말할 기회는 정말 많았을 텐데. 아주 오래 전부터도. 옆자리에 앉아 태연하게 땡땡이 칠 궁리를 하는 와중에도. 하얀 침대에 누워 자신의 손바닥에 쏙 들어올 작은 뒤통수를 가만히 지켜볼 때에도, 파도에 젖은 모래를 밟는 한 줌짜리 발목을 쫓아다니며 흩어질 발자국을 나란히 찍는 사이에도. 잠깐 눈썹을 까딱 움직이는 사이 리안이 정강이를 걷어찼다. 슬슬 행동의 함의는 이해했다. 불만이다.

그러나 여전히 어디서 불만이 초래했는지는 알지 못한다.

 

 

 

4월 17일이 닥쳐온 주의 일요일, 남자의 걸음은 거리를 떠돌고 있었다. 챙겨본 적이 없으니 뭘 줘야 하는지, 어떤 걸 준비해야 하는지도 잘 몰랐다. 아는 녀석들에게 연락해보면 형님의 연락으로 충분합니다, 같은 허무맹랑한 농담이나 해대니 영양가가 없었다. 좋아하는 걸 주면 좋을 것 같은데, 나 빼고 또 뭘 좋아하는지 알아야 말이지.

 

거리에 신발 뒤꿈치가 한참을 부딪히면 비로소 생각이 하나둘 떠올랐다. 함께 오가던 길목에 잔존한 기억이었다. 와인에 치즈 몇 조각 깨작거리는 걸 좋아했던 것 같다. 저쪽 레스토랑에선 연어 스테이크를 먹었다. 좋은 술 한 병에 안주로 괜찮은 치즈를 사고, 리안이 했던 것처럼 케이크도 사면 되려나. 몇 가지를 헤아리고 나면 겨우 긴장이 풀렸다. 남자는 내친 김에 치즈와 어울리는 와인을 추천받아 구입하고, 이제 이걸 어디에 숨겨둬야 리안이 찾아내지 못하고 선물이라는 역할에 충실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보석 같은 두 눈이 낙담하지 않기를 기원하며.

이제 생일은 마음의 가장자리에 닿는다. 누군가 의미를 담아 기다리고 있는 날이므로.

write 230313

2023.03.13 12:00 # reply

충사AU

 

 

 

어느 날 주운 남자는 이형의 것에 가까웠다. 구태여 고르자면 흐름이의 일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나치게 옅었다. 다만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었고, 언어를 사용할 줄 알았다. 광맥 줄기 근처에 숨겨두었던 모양인지 남자가 걸친 두꺼운 비단 옷에선 광주 특유의 강한 향이 났는데, 꼼꼼하게 확인해보면 손이며 긴 머리카락에서도 향이 묻어났다. 카미카쿠시라 일컫곤 하지만 진짜 신은 아니었다. 드물게 기록에 나타나는 안개도롱이다. 녀석은 안개 같은 것을 흩뿌려 먹잇감의 인지를 흐리게 하고 그것을 몸으로 휘감아 저 아래로 가라앉은 뒤 오래도록 소화시킨다. 이번에도 먹이를 구하려 했을 뿐이다. 실수로 지나치게 큰 것을 삼킨 거지. 다만 돌아온 존재가 이토록 희미해진다면, 과연 신이 숨긴 것이 될 법도 하다고 생각했다. 

 

"언제 먹혔는지도 기억이 안 나?"

"몰라."

"적당히 그 정도는 기억해달라고."

 

그래야 돌려보내지. 그는 벌레담배를 문 채 중얼거렸다. 여러 모로 번거로워졌다. 광주의 향은 벌레를 꼬이게 한다. 다행히, 아주 저 편으로 넘어가버린 것은 아닌 듯 했다. 진짜 광주만큼 주변이 풍요로워지지는 않았으니까. 오래 머무르면 유사한 효과를 보이게 될 것이다. 우선은 계속 걸을 수밖에 없었다. 먹힌지 오래된 것이 아니라면, 이만한 미인이라면, 분명 아는 이가 나올 터였다.

 

 

*  *  *

 

 

허탕만 치며 주변의 마을을 세 개째 돌았을 때다. 옆에서 갑자기 욱, 하는 소리가 들렸다. 먹은 것이 없어 토해낼 것이 없는데도 구역질은 지속되었다. 바닥을 짚은 팔이 벌벌 떨렸다. 그는 옆에 같이 주저앉아 남자의 등을 토닥였다. 투명한 액체나 몇 번 뱉었을까, 눈물 고인 뾰족한 눈이 이쪽을 봤다. 

 

"말로 해, 말로."

"힘들어…"

"그건 너무 늦었거든. 뭐 얼마나 걸었다고… 큰 마을도 아니었는데."

"……."

 

침묵이 이어졌다. 죽어가는 미인을 놔두고 더 우길 수도 없는 노릇에, 같이 입을 닥쳤다. 차라리 들고 가는 쪽이 낫겠다 싶어 번쩍 안아들었더니 잠깐 다리만 힘없이 몇 번 까닥거렸다가-어쩌면 바둥거리려고 했던 걸지도 몰랐다- 그에게 기대는데, 영 무게가 느껴지지 않았다. 품에 가득 밀려오는 진한 광주 향에 괜히 입맛만 한 번 다셨다. 풍성한 머리카락이 어깨를 타고 쏟아졌다. 색까지 희여멀건 까닭에 정말로 광맥 줄기에서 막 건져낸 느낌이었다. 실제로 거기 휩쓸리면, 뭐, 흔적도 남지 않겠지만…

 

"그거."

 

돌연 흰 손이 그의 입가에 닿았다. 안색이 나빴다. 표정도 좋지 않았다. 손은 벌레담배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거 뭐?"

"별로야."

"어쩔 수 없어. 나도 좋아서 물고 있는 게 아냐."

 

새침하게 몰라, 하고 말을 뱉더니 깨끗한 손이 소맷자락 안으로 숨었다. 얼굴까지 가린 저 옷소매만 해도, 촘촘하게 새겨진 자수가 상당히 고풍스러웠다. 상당히 값비싼 것일 텐데 근방에는 저 정도로 부유한 마을이 없었다. 오래도록 이동했다고 봐야 하는 것일까? 그렇다 치기엔 벌레가 삼키기엔 너무 무거웠을 텐데, 그는 잠시 시간을 가늠했다. 아주 오래 숨겨졌던 쪽이겠어, 먼 과거에. 그 시기는 명확하지 않을지언정 선명한 직감이 진실을 짚어냈다.

 

이름도 과거도 전부 두고 와버린 남자는 지나치게 가볍다. 사람이라면. 사람에게 마땅히 있어야만 하는 것마저 잃어버린 것 같았다. 그러나 영혼이 아직 남아 있었다. 싫고 좋은 것이 아직 분명했다. 생의 원천에 지극히 가까워져 피안의 경계가 희미해졌을 뿐, 고르자면 이쪽이다. 그는 잠시 머리를 숙였다. 익숙해진 듯 했다가도 가까워지자 광주 향이 짙게 묻어났다. 

 

향이 흩어질 때까진 데리고 다녀야겠어. 이대로 내버려두면 혼란이 가중될 뿐이다. 슬픈 일이지 않은가. 아주 오래도록 헤매이다 간신히 돌아왔는데, 벌레들의 소란을 불러 일으켜 도로 쫓겨난다면. 

 

아주 아득하게 멀어지겠지, 그렇게 정말로 벌레가 되어버리는 것은. 사람에게는 너무나도 슬픈 일이다. 묵묵히 걸음을 옮긴다. 규칙적인 흔들림에 입가를 가리고 있던 소맷자락이 떨어진다. 졸린 듯 머리를 기대오는데 그 무게가 도무지 이 세상의 것 같지 않다. 벌레막이 용으로나 쓰는 걸 약으로 먹여야 할 판이다. 경우가 많지 않아 치료도 쉽지 않다. 꼭대기 풀의 치료 건을 참고해봐야 할지도 모른다. 벌레의 기운을 띄게 됐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그래도, 그래. 어쩔 수 없지. 짙은 향이 모두 흩어지기 전까지는, 홀로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기 전까지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고, 이 세상에 발 붙이고 싶다고 느끼기 전까지는.

 

 

네가 아무리 싫다 해도.

어쩔 도리 없이 함께다.

write 230309

2023.03.09 12:22 # reply

현대 AU

 

 

 

리안의 손을 만져보면 희고 부드럽다. 거스러미 없이 관리된 손톱 가장자리와 둥그렇게 잘린 끝이 눈에 띄었다. 흉터나 긁힌 자국 없이 깨끗했다. 손은 다친 적이 없냐고 물어보니 고작해야 종이에 베인 정도였다. 하기사, 그는 바이올린 연주자다. 손은 귀중한 법이다. 데릭 자신이야 칼 손잡이 쥐는 것에 문제 생기지만 않으면 그만이지만, 리안이 연주하는 것은 그로서는 흉내조차 내지 못할 섬세한 음이었다. 듣고 있자면 미간 사이가 간지러워지는 느낌이 들곤 했는데, 연주가 끝나고 나면 어떻게 안 것처럼 손을 뻗어 앞머리를 가볍게 쓸어주었다. 그 자신도 최근에 이르러서는 리안이 손을 뻗으면 슬쩍 머리를 기울이는 때가 종종 생겼다. 

 

 

때로 깨끗한 손은 자신의 이마를 스치곤 한다. 지나치게 익숙해져 인지하지 못하는 흉터를 감각해낸 첫 날에 리안은 염려를 표했다.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종류의 것이다. 놔두면 없어지겠지 싶었으나 움푹 패인 자리에 하얀 새살이 차오른 뒤로는 없어질 일도 영영 없겠군, 생각했던 것. 상대의 이마는 그 손처럼 깨끗하다. 아프지 않아. 너무 신경쓰지 마. 하지만 리안에게는 그럴 수 없는 것이었던 모양이다. 신경쓰지 않을 수는 없어요. 좋아하는데, 하고 말을 흐렸다. 데릭은 잠시 말을 멈췄다.

 

"당신이 너무 스스로를 신경쓰지 않으니까."

 

말하자면 그 대신 이 흉터를 제 것처럼 걱정한다는 것이다. 이상하지,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상처는 익숙하고, 통증은 때때로 역치를 초과할 뿐이다. 흉터는 생을 따라 빗금으로 새겨진다. 생채기와 크게 다를 바 없다고 여기는 실금 같은 자국들, 있는 줄도 모르고 살던 것들을.

리안은 그에게 과거를 돌아보게 하고, 되새기게 하곤 했다. 당신을 좋아하기 때문이라는 말 하나로.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그런 건 번거롭고 불편하잖아. 그러나 잊어버린 것들은 아주 없어지지 않고 어딘가에 흉터처럼 남아 있다. 그는 기어코 흉터를 되새기게 한다. 흉내조차 내지 못할 번거로운 방식으로. 깨끗한 손이 여전히 이마를 스친다. 데릭은 기어코 이 맹목적인 애정에 재차 항복하고 말았다. 

 

 

다시, 앞머리를 쓸어주는 상대가 눈 앞에 있다. 급하게 들고 오느라 몇 송이 목이 꺾였지만 크게 티는 나지 않는 꽃다발을 안긴다. 이내 환하게 웃는다. 지나치게 약하고 쉽게 시들어버리고 결국 버려야 하는데도. 꽃다발조차 잊는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닌 걸까. 너무 좋아하지는 마, 다칠 텐데, 넘어질 텐데. 데릭은 잠시 숨을 삼킨다.

 

'잡아주는 수밖에 없나.'

 

흉터가 남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는 거겠지. 상대의 미소를 따라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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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28 16:42 # rep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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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안의 컬리지 졸업장을 받아들며 데릭은 새삼스레 이 애가 상당히 엘리트구나 하는 생각에 잠겼다. 고상하게 필기체로 적힌 그 애의 긴 이름을 읽으며 들었던 짧은 생각은 클레안데르 엘가 바르드가 리안이라는 한 사람으로 자신의 옆에 있어주는 것이 대단한 행운이라는 간지러운 감상까지 이어졌는데, 애석하게도 이런 감상이 곧이곧대로 입 밖으로 나오는 날은 없었다.

 

고등교육을 받던 시절을 생각하면 데릭 그 자신은 마치 사회에서 수용하기 힘든 형태의 반항적인 인간처럼 느껴졌다. 그는 언제나 떠나고 싶었고, 멀리 걷고 싶었고, 도와달라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었는데, 앉아서 지루하게 외워대는 공식이며 고전 문학 따위는 정말이지 단 한 번도 그의 흥미에 들어온 적이 없었다. 따지자면 사람 정도나 그의 흥미요소였을까? 긴 금발을 드리우고 매사 태연하게 웃는 1학년 말이다. 또래 애들이 2학년, 3학년이 되어가도록 그는 1학년 교실 맨 뒤쪽에 앉아 턱을 괴고 있었다. 세번째의 입학식을 구경하면서는 완전히 흥미를 잃어 누가 누구인지도 구분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니까, 2년 묵은 1학년과 엇비슷하게 키가 크다는 이유만으로 맨 뒤에 나란히 앉아서, 당신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학교에 나오는건가요, 하고 잔소리하는 앳된 얼굴의 1학년을 인식하고 호의를 지니고 그에게 대뜸 같이 나가지 않겠냐든지, 저기 아름다운 게 얼마나 많은지 아냐든지, 하고 지껄이게 된 것은 그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던 셈인데…

 

"그 땐 너 말고 그렇게 챙겨주는 사람이 없었지."

"난 당신이 대체 왜 학교에 나오는지 궁금했는데 말이죠."

"그래도 자퇴 안 하길 잘했지! 피크닉 재밌었거든."

"기억은 하고 있네요?"

"못할 것 같았나봐."

"그야."

 

잠시 대화가 멈춘다. 데릭은 소파에 기대지도 않고 반듯하게 앉은 리안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기댈까? 글쎄, 높이가 안 맞아서 불편한데. 그대로 몸을 더 기울여 상대의 다리 위로 냅다 누워버렸다. 들고 있던 리안의 졸업장으로 얼굴을 덮고 중얼거렸다. 그거 제 졸업장이에요. 알아.

 

"너네 부모님은 이렇게 긴 이름을 어떻게 다 부른대."

"…심각하게 잘못했을 때 아니면 그럴 일도 없답니다."

"오, 불려본 적은 있고?"

"몇 안 되긴 하지만요."

"모범생일 줄 알았는데."

 

대답 대신 주먹이 돌아왔다. 그는 문득 대수롭지 않게 먹여살려달라고 말을 건넸던 때를 생각했다. 슬그머니 졸업장을 내려 상대를 올려다보면 이쪽에 드리웠던 시선이 빗겨나간다. 상대의 귀는 머리카락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이봐, 리안. 리안테."

"왜 그렇게 불러요."

"왜 기다렸어?"

 

다시 대화가 끊긴다. 내가 널 축하하길 기다렸어? 아니면 찾아오길? 같이 대학까지 진학하는 걸? 네 앞에 나타나는 걸? 네가 날 좋아하니까? 그는 뒷말 없이 가만히 상대를 올려다보다가 씩 웃고 몸을 일으켰다.

 

"너무 좋아하면 다친다."

 

다시 한 번, 새삼스럽지만 클레안데르 엘가 바르드는 엘리트다. 그토록 자연스럽게 친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이유 모르게 가까워졌던 그 때는 언젠가 흘러갈 것이다. 다치는 건 늘 잃을 게 많은 쪽이다. 그는 리안이 너무 다치지는 않기를 바랐다. 그 자신이 다치는 건 대수롭지 않은 일, 아무래도 좋은 것, 열쇠를 잃어버리거나, 실수로 캔을 밟고 넘어지거나, 주먹을 잘못 휘둘러 손등에 생채기가 남는 사소한 사건과 같지만. 열린 창문에서 미풍이 나부낀다.

 

"그래도 좋아할 거야?"

 

그래도 괜찮다면 어쩔 수 없지, 다치면 반창고 정도는 붙여줄게.

안일한 마음가짐과 독선적 결론에 이은 최악의 답변이었다.

230228

2023.02.28 10: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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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24 13:33 # reply

 

 

연금술사가 있을 때가 좋았지, 하고 무심하게 말을 꺼내놓고서, 어쩐지 귀가 처졌는데 왜 그래? 하고 물으면 음유시인으로서는 할 수 있는 말이 많지 않았다. 전면에 나서는 인간이란 아무리 조심한다 해도 기어코 상처 하나, 흉터 하나 새기게 되었다. 심지어 하늘에서 날아드는 적이란 예상하기 쉽지 않은 일이지 않은가. 남자는 팔을 스친 마물의 발톱 자국에 피를 쏟으면서도 기어코 적들의 날개를 꺾고 숨통을 끊어놓았다. 충격을 가라앉히고 무모했어요, 하고 말하면 그는 대꾸한다. 네가 다치잖아.

파티에 공주와 연금술사가 함께 있을 때부터 늘 이런 식이었다. 그러나 일원이 절반으로 똑 줄어든 지금으로서는 치유력을 올려주는 연고를 재깍 만들어 준다든지 하는 것은 불가능의 영역이었고, 음유시인에게는 그런 재능이 없었다. 그는 어떤 재료를 어떤 비율로 섞어야 충분한 효과를 낼 수 있는지, 얼마만큼의 용량이 필요한지를 가늠하는 것에 대해서는 배우지 않았다.

대신 남자는 섬세한 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현을 얼마만큼의 힘으로 잡아야 어떤 소리가 나는지에 대해서 잘 알았고 음이 어떻게 흐르고 조합되어야 아름다운지를 아는 사람이었다. 검사는 햇빛에 데워져 뜨끈한 돌을 의자 삼아 앉아서, 그 모든 아름다움을 초라하게 하는 말을 태연하게 내뱉고는 멍하니 밝은 길거리 위의 참상을 구경하다가 웃었다.

 

뭐, 날이 좋으니까 됐어! 금방 나을 테니 신경쓰지 마. 

신경쓰지 말라고 해도 말이죠. 당신은 너무 무뎌요.

정말 괜찮아. 살아있는 것으로 충분해. 죽을 상처도 아냐.

무슨 소리예요. 별 일이거든요.

그래도 살아있잖아!

 

음유시인은 잠시 말을 잃었다. 쓸데없이 고집만 센 사람! 그런 생각이 스쳐가는 찰나, 그 모습을 보고 검사는 내 말이 맞지, 하고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하기사 틀린 말은 아니다. 두 사람 모두 그 말에 공감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기는 했다. 그러나 그 삶의 방식은 전혀 다른 형태였으므로 형태의 유사성에 불과할 뿐, 공감의 방향은 전혀 달랐다. 검사는 저 뒤에 무슨 말을 덧붙여야 한다면, 살아있으면 언젠가 다 좋아져, 하고 말을 이었을 테고, 음유시인이라면 그래요, 살다 보면 복수할 수 있겠죠, 하고 대답했을 것이다. 적어도 그 자신에게 벌어진 일이라면 그렇게 덧붙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상대가 저 태평한 작자인 한 그럴 수 없다. 마음의 무게 앞에 객관성은 소실되기 마련. 그는 마음을 기울이고 상대의 안위에서 눈을 뗄 수 없다.

 

검사의 손이 꽉 쥐고 있던 검의 손잡이를 비로소 놓는다. 어둡고 마디 굵은 손은 악기를 쥐여줬다간 현이란 현은 다 끊어먹을 것이다. 그는 음유시인이 들고 있는 악기가 얼마나 오랜 세월을 지내왔는지, 어떤 방식으로 조율이 되어 있는지, 현의 굵기가 어떻게 다른지는 알지도 못한 채 태연하게 좋은 걸로 하나만 연주해주면 안 돼? 하고 말했다. 그래도 너무 졸린 건 안 돼, 효과가 너무 좋잖아. 저 놈들, 연주를 듣자마자 정신을 못 차렸다고.

 

태연하고 무심한 말들이 이어진다. 연주를 기다리며 검사는 드물게, 마물의 시체에서 무언가 루팅하는 행위를 잠깐 미뤄두기로 한다. 음률의 고상함을 몰라도, 섬세함과는 거리가 멀어도, 지금 곁에 누가 남아있는지, 무엇을 좋아해야 하는지는 정확히 알고 있으므로.

 

(검사에게는 슬프게도 그 뒤로 이어진 것은 당장 치료받으러 가야 한다는 내용의 잔소리였으리라.)

 

 

230223

2023.02.23 18: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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