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 back memo guest
   
ɴ
   

 

"살아갈 의지가 있다면 어디라도 천국이 돼…

 왜냐면 살아있으니까…

 행복해질 수 있는 기회는 어디에라도 있어."

기타

2024.03.28 22: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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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2024.03.26 23: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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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17 21:59 # reply

이즈키. 이마가 맞닿은 채, 이색의 눈을 마주친다. 밤의 벚꽃에 홀렸던가, 이제 와 무르기엔, 이제 와서는 그런 것으로는 달래지지 않겠지. 불렸던 이름에는 열띈 감정이 꾹꾹 눌려 흘러나온다. 번거롭게 됐다는 생각 뿐. 물러서기에, 등 뒤에는 나무 기둥, 더듬은 바닥엔 자신의 머리카락이 잡힌다. 칼로 베어낼 수는 없다. 어쩔 도리 없이, 나오야, 부르는 목소리는 조용하다. 손바닥으로 눈 앞의 나오야를 가린다. 뺨을 감싸는 듯한 손짓으로. 단번, 그 위에 손이 겹친다. 감정은 손을 따라서도 배어나는지 뜨겁다. 나오야, 다시 부르는 목소리에는 희미한 선이 그인다. 이 선을 따라와, 내 말을 들어… 그러나 열망은 좀처럼 가라앉는 법이 없다. 맞닿은 입술도 잠시, 사이로 미끈한 살덩이가 파고 든다. 이즈키의 미간에도 선이 어린다. 열감은 입 안을 뒤섞고, 선을 지킬 줄을 몰라… 어깨를 밀어내려 해도 뺨을 쥔 손 위에 겹친 손은 단단하고, 바닥을 짚은 손을 뗄 수는 없다. 미끄러질까, 이대로 균형을 잃을까 두려워. 그러나 기어코 나오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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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17 19:36 # reply

눈 쌓이는 소리가 이어진다. 그 한 겹 너머. 유리창에 김이 서린다. 달뜬 숨이 섞인다. 흰 몸을 끌어안은 채, 여자의 흐린 시야 대신 상대에게 몰두한다. 읽어내는 과정일 뿐이다, 벌레를 내보내는 과정일 뿐, 그런데도, 매달리는 호흡은 지나치게 뜨거워서,

 

무언가 착각할 것만 같다고. 어디서부터 잘못 길을 들었던가, 짐작은 가지 않았다. 흐트러진 기모노 자락과 오비에 시선을 주며, 필사적으로, 저것을 다시 돌이키려면 시간이 걸리겠지, 사고의 흐름을 돌리지만 당장에 엉겨든 것은 살갗으로 닿아오는 검은 머리카락, 한 겹 한 겹을 벗겨내던 그 순간이 선명하다. 준 님, 가는 목소리가 힘겹게 그를 부른다. 평소와는 다른 새된 목소리, 들뜨고, 어딘지 새 같았다. 저는, 그 다음 이어질 말은 알고 있다. 착각할 리 없다. 너는 나를 믿고 있다. 그럼에도 이 순간은 지나치게 가깝다. 조그만 어깨를 감싸안는다. 우리는 괜찮다. 너는 괜찮으니까.

 

준 님. 다시 불러온다. 남자는 찰나의 착각을 견디지 못하고, 시에, 이름을 불렀다.
파정이었다.

이쿠하라 인터뷰

2024.02.21 23: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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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18 21:49 # reply

 

 

헛짓이다. 짧게 단언했다. 연기가 매캐했다. 팔뚝에 약을 꽂아넣고도 허리를 따라 통증이 올라왔다. 약의 효과를 의심할 수는 없으니, 통증에 무뎌졌거나 그만한 상처인 까닭이다.


진귀한 손님이 아닌가, 자네 만날 날을 익히 기다렸는데. 허허로이 웃으면서도 눈 가늘게 뜬 남자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표적 중 하나였으나, 박쥐처럼 잽싸 제대로 칼 꽂을 날은 없었다. 칼은 손에서 미끄러진지 오래였다. 가늠하는 시선이 오간다. 기다렸다고. 현상금이 달렸을 리는 없다. 토사구팽, 부러진 칼에 가치를 두지는 않는다. 돌아갈 수 없는 것을 그리워해도 소용은 없다. 쓸모는 끝났다. 그럼에도 일말의 여지조차 없는지…. 생각의 꼬리를 잡아물고 능청스런 목소리가 이어졌다.

 

"자네 귀인을 그리 보아서야 되겠는가. 끈 떨어진 신세에 박하게 굴지 말게. 본인의 목숨 떨어지면 자네 몸 뉘일 자리가 어디 남겠어."
"왜 여기까지 데려왔지."
"이리 야박하게 말해서야, 찾아온 보람이 없겠구만. 자, 자, 그러지 말고 들어보게나…"

 

까닭은 경호다. 꼭대기에 오른 것은 제 아래 둔 사냥개를 삶아 죽일 지경에 이른 미치광이. 사람 아닌 것에 마음 주지 않는 이가 제 뜻대로 거리를 쥐락펴락할 요량이다. 박쥐는 혼란이 도래할 것을 짐작했다. 그래서 때마침 버려진 칼을 주웠다. 그 뿐이라고. 되뇌이면 남자가 웃는다. 덮고 있는 이불에 담뱃재가 떨어진다. 이이, 그 편이 훨씬 마음 놓이지 않는가. 이제 와 본인을 죽인다고 돌아갈 수는 없다네. 자네는 그 여자에게 '사람'이 아니잖는가.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사무친다. 네가 무엇을 안다 쉽게 지껄여. 날카로운 반응은 실제를 알기에 도리어 뚜렷하다. 창가로 차가운 밤의 불빛이 스친다. 해가 들지 않은지 오래된 냄새가 난다. 담뱃불이 사그라든다. 남자는 쥐고 있던 성냥갑을 여자에게 밀어주었다.

 

"어허, 실수했구만. 마음 풀고 한 대 피우겠나."
"피우지 않는다."
"코토네의 것인데도."
"네 뭘 믿고."

 

여전히 웃는 눈이 이쪽을 본다. 

 

"자네, 그리 욕심이 없지는 않을 텐데. 왜 그리 어려운 길을 고르려 드는 겐지. 본인 옆은 넉넉히 비어 있으니 마음껏 골라도 된다네. 적은 피차 많지 않은가."
"네놈이라고 다를 것 같나."
"암, 다르고 말고. 섭섭하게 말하지 말아. 적어도 사람으로는 보지."

 

칼 한 자루가 아니라. 무심결에 손 끝이 주변을 더듬는다. 남자는 이어 칼을 밀어준다. 손잡이를 여자의 방향으로 돌린 채다. 단단히 미친 놈이 분명하다.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하고 있는 것이다. 눈이 마주친다. 웃고 있나, 아니, 웃고 있지 않다. 이렇게 살아 버틴 것이다. 여자는 이 다음의 말을 알았다.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칼을 꺼내 찌르면 된다. 간단하다. 사람으로 보지 않도록, 여기서 끝을 내도록, 이 이상 남에게 마음 따위 내주지 않아도 되도록. 그러나,

 

"어찌 생각해, 칸논."

 

여전히 실패하고 만다. 여자는 칼 손잡이를 쥐지 못했다.
후회하겠지. 그 말 한 마디가 다시 뇌리를 울렸다.

write 240218

2024.02.18 20:53 # reply

 

 

실패의 연속. 삶의 무엇 하나 제대로 쥐지 못했다. 낡은 금속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 소리는 불규칙적이었다. 호흡을 가다듬으려 몇 번이고 삼킨다. 목 너머에서 피비린내가 올라온다. 움직일 때마다 박힌 비수가 근육을 파고드는 듯 했다. 통증에는 익숙했다. 칼잡이에게 칼 맞는 일이 대수로울 것은 없었다. 매 시간마다 예고는 들이닥쳤다. 배척하는 듯한 시선, 방 앞을 맴도는 고요한 발걸음, 외출 후의 방에 타인의 흔적이 묻어나기 시작한 그 때. 문 틈새 끼워둔 머리카락이 떨어져 있는 것을 몇 번이고 보았다.

 

문제는 하나. 이 배신이 영영 찾아들기를 바라지 않아 눈 감고 외면한 자신이다. 불야성, 쏟아지는 매연 사이 홀로 청청한 마천루에는 언제나 주인이 있으니. 버려진 짐승의 삶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 따위도, 아주 잘 알지만.

 

사무치게 외로워 마음을 내주었다. 계단을 헛디딘다. 난간에 몸이 부딪혔다. 시야가 어지러웠다. 조금만 더 올라가면 오래 전 머물던 집. 과연 저 문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는 짐작할 수 없다. 녹슨 열쇠를 버리지 않은 것은 천운이겠으나, 하늘의 뜻을 알 수 없기에. 아침부터 날이 지나치게 좋았다. 형광빛 네온사인에 낭비하기에는 맑은 하늘이었다. 여자의 가족은 이미 핏물 한 줌으로 돌아간지 오래, 과거의 배반자를 척결한다는 명목 아래 숨이 흩어졌다. 실질 죄가 없던 것은 모두 알고 있었다. 충성을 확인할 요량이었으리라. 자신의 손으로 죽였다. 여자의 남편은 눈을 마주치며, 당신은 후회하겠지, 하고 말했다.

 

관음의 칸논, 흐르는 버들가지를 모사할 줄 모르는 자. 조직의 우두머리는 웃음을 터트리며 여자에게 양류관음도를 선사했다. 자네에게도 물 위의 달을 바라보는 운치는 있을 텐데. 버들가지를 쥘 줄은 모르는 게지. 처참한 마음도 누군가의 신뢰 아래서는 어렴풋 위로받는 듯 했다. 아니, 실질 남은 것이 그뿐임을 알았기에… 자비 없는 구제의 현신이었다. 훌륭한 청소부였다. 오탁을 닦아내리라. 언제고 당신의 시선이 나를 향할 수 있다면.

 

당신은 후회하겠지.

 

후회하겠지. 칸논은 비로소 그의 말을 되새겼다. 머리가 차게 식어가는 지금에서야. 피를 쏟아내 도리어 정신이 명료한 듯 했다. 기어올라오다시피한 계단, 아래를 보면 핏자국이 점점이 흩어졌다. 비라도 쏟아지면 좋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지혈이 끝나고 죄다 닦아내야 한다. 뒷처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돌아가는 길에는… 아니, 돌아갈 곳은 이제 없다. 무엇을 후회하고 있는 건가. 필요한 사람이 되지 못했던 것을, 보다 제대로 죽이지 못한 것을, 돌려주지 못한 것이 남아있는 것을, 무엇을 하지 말아야 했던 것인지. 간신히 문 앞에 선다. 오래된 열쇠를 쥐고 구멍에 쑤셔넣는다. 저 너머에는 누구도 없어야 한다. 누구도 없을 것이다. 모두 그의 손으로 부순 것이니까. 그러나 누군가 있다면.

 

어쩔 도리가 없었다. 더 이상 돌아갈 곳은 없다.

최후의 패배가 목전이었다.

write 240209

2024.02.09 17:19 # reply

사리자여, 색과 공이 나뉘지 않으며, 공이 색과 나뉘지 않으며, 색이 곧 공이자 공이 곧 색이니, 받아들이고 상념하며 행하여 분별하는 것 또한 그렇다. 

 

항구의 사람들은 누군가를 닮은 큰 목소리로 외친다. 그들은 어디로 가야 하는 줄을 잘 알았다. 배를 띄우고 물길을 넘나든다. 물 속엔 미역이, 어린 물고기의 시체가, 깨진 조개가, 어디로 가야 할 줄 모르는 것들이 파도를 따라 떠밀려 오는데 누구도 거기에 시선을 주지 않았다. 모두 헤아려, 두 손에 담아 보아도 물길이 빠지면 그뿐. 물에서 살아가던 것들을 뭍에 내놓아 무슨 소용이겠는가, 도로 물로 보내주었다. 그 모든 것이 허상은 아니었으리라. 웃고 떠들던 이들을 지켜본 일, 사람들의 감사 인사, 이해할 수 없다는 시선, 허상이 아닌 것은 잘 알았다. 그러나 모든 것은 가야 하는 길을 따라 스쳐 간다. 여자는 과거를 되짚었다. 더 이상 돌아갈 길 없는 것을 지나치게 잘 알았다. 그렇다면 무슨 소용인가, 붙잡을 것도 마음을 쏟을 것도 본래 실존하지 않는 것이라면. 그 모든 것이 알알이 흩어지고, 또 어디선가는 무언가가 되어간다면, 그러나 이 만생萬生의 인연이 나를 두고 간다면, 이 모든 가능성이 나의 손 끝에 잡히지 않고 물결처럼 스쳐간다면.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 수 없어, 하늘을 보면 거기에는 달이 떠 있었다.

 
허깨비 이상이 되지 못할 외로움, 한 때를 스쳐갈 당신과 다르지 않아. 변하고 부서지는 것, 모두 빛 아래의 허상, 당신이라 한들 다르지 않아. 그렇다면 언제고 하늘을 보아, 달은 나날이 차고 기운다. 어둠 아래서, 아주 기울어도 아주 차올라도 거기 있는 것. 다르지 않음은 익히 안다. 그럼에도 나를 떠난 적 없다면.

 


나의 정토는 그것으로 족해. 

write 240130

2024.01.30 21:18 # reply

돌아가야만 한다. 돌아가야만.
어디로. 여자는 여전히 여기에 있다. 

 

이제 돌아가야만 하는 곳은 없고, 이 섬에는 아직 해야만 하는 일들이, 이렇게나 많은 것을. 


"나는 이런 이야기 같은 것, 하고 싶지 않다."
"그럼에도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

"아름다운 향을 내는 벌레에 대해 알고 있나."


여름 그늘에서 죽어가던 것이 누구였는지는, 영영 알 수 없을 것이다.

 


천녀님, 천녀님. 
천녀님, 소원을 이루어 주십시오. 
하늘에서 내려오신 천녀님.
아름다운 향이 나고, 
눈 감은 채 깨어날 줄 모르는 천녀님이시여.
하늘로 올라갈 적에는, 부디.

 

 

"죽은 사람은 말을 할 수 없지."

 

손톱 밑에 흙이 끼고, 땡볕에 땀이 흐른다. 거친 나무 괭이를 휘두른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여자는 그늘 아래에서 그것을 본다. 누군가 묻는다. 충사님, 혹시, 여자는 말한다. 그런 것은 할 수 없다. 할 수 없다고 대답해선 안 됐던가, 해야 했던 말은 그런 방법은 없다, 고 단언하는 것이었던가. 오랜 시간을 마을에 머물렀으나 충사는 부귀도 풍요도 불러오지 않고, 오직 현실의 이야기로만 응답했다. 자비를 모르는 관음. 가을의 수확을 기다려 겨울을 견딘다. 봄은 낫다. 여린 싹을 뜯어 소금에 버무리고 나물을 무칠 수 있으니. 매서운 것은 언제나 여름. 음식은 쉽게 상하고, 어린 것들은 더위에 울며 여유를 잃는다. 날카로운 눈물, 귀가 아파 목소리를 드높이고 언쟁이 이어진다. 계절이 몇 번이고 반복되어도 나날이 사람의 마음은 메말랐다. 쓰러진 여자가 발견된 것은 그 즈음이었다.

 

"나는 당시 머무르던 마을에서 그것에 감염된 시신을 만났다."

 

무더운 태양, 서늘하게 식은 몸, 섬세한 비단으로 몸을 감싼 여자는 아름다운 향을 내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 처음으로 여자를 발견했던 농부가 말하기를, 분명 눈을 마주쳤다, 살아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 어떤 것에도 여자는 깨어나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턴가 그 여자를 천녀라 부르는 이들이 생겼다. 천녀님, 천녀님. 그들이 바라는 것은 충실한 자비와 환상 같은 구제, 깨끗하고도 차가운 물 한 모금, 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가을의 풍요와 겨울의 고요를, 봄의 탄생과 여름의 생명만을 원했다. 사람의 욕망에는 끝이 없다. 그런 것은 있을 수 없다. 오탁 없는 세상이 어디에 있나, 관음은 자비 없는 구제를 베푼다. 누구도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 시신을 천녀라고 모셨고, 나는 벌레를 퇴치했다."

 

"그것은 불에 약해, 생사를 모독할 권리를 그것에게 허락할 수는 없었다."

 

맹목은 눈을 가리운다. 여자는 그들을 그렇게 둘 수 없었다. 홀로 마음을 주었던 까닭이다. 무엇 하나 공감해주지 않으면서도, 무엇 하나 기적을 줄 수 없으면서도, 여자는 이 메마른 땅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눈을 마주치고 싶었다. 벌레도 제대로 꼬이지 않는 메마른 산맥 언저리. 불길이 맑은 하늘을 뒤덮는다. 매캐한 연기가 하늘을 찌른다. 타들어가는 천녀는 눈을 뜨지 않았다. 하늘로 올라간 것처럼 홀연히 타들어가 아무 것도 남기지 않았다. 자, 불타오른 자리에는 저주와 비난과 증오가 있다. 여기는 나의 정토인가, 아니, 여전히 사바세계다. 단 한 번도 관음은 정토에 발 디딘 적 없다. 십악의 예토, 무엇 하나 구원받지 못하니 여기 홀로 고독해, 누구라도 나를.

 

"때로는 시신에 깃들어 산 것처럼 생생한 모습을 유지한다."


"향은 오래 맡으면 무뎌지고, 불쾌한 향도 아니니 외면할 이가 많지 않다."

 

"그러나 누구도 반기지 않았고, 마침 기록자의 서신을 받았다."


"그대로 떠나, 지금의 토류다."

 

 

지금의 토류에는, 충사가 끝없이 필요하다. 기이한 시간에 갇혀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섬을 떠날 수 없다. 여자는 차라리 지금을 평온으로 여겼다. 돌아가야만 하는 곳은 없다. 돌려주어야만 하는 것도 없다. 기다리는 것도, 그 무엇도, 모두 비어서.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인데, 어찌 하고 싶지 않았는지는."

 

"……."

 

 

"알 필요가 없지."

오소리에게 받음

2023.12.23 14: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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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07 15:38 # reply

 

 

 

계절에 맞지 않는 차림이었다. 얇은 재질의 치파오는 무대의 빛을 받을 때마다 부분이 빛났다. 분명 금사로 무늬를 낸 거겠지, 생각하며 소년은 무대 뒤의 천에 숨어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목소리는 아름다웠지만 그가 알 수 없는 어떤 감정에 젖어 있었다. 잊히지 않을 것만 같은 풍경이다. 무대가 끝나고 불이 꺼지면 시꺼먼 양복 차림의 남자들이 가수를 데려갔다. 저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가. 이름 없는 소년은 이름 모를 가수가 두꺼운 모피를 어깨에 걸치고 검은 차에 타는 모습을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

 

 

"난초의 란이래."

"뭐가?"

"그 가수 이름." 

"에… 그렇구나."

"엄청 어리던데. 여기 잘못 온 거 아냐?"

"몇 살인데?"

"이제 열아홉 살."

 

할 말이 끝났다는 듯 입을 꾹 다문 여자애는 때 낀 손바닥을 내밀었다. 소년은 주머니를 뒤져 동전 두어 개를 올려주었다. 빼앗아가기라도 할 것처럼 동전을 강하게 움켜쥔 상대가 후다닥 뛰어갔다. 썩 도움되지는 않겠지만 소년도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메이레이, 조심해! 넘어져!"

 

골목 모서리를 따라 메이레이가 휙 사라진다. 짧게 한숨을 쉰다. 다시 계단에 앉아 턱을 괸 소년만 남았다. 도시 설계 과정 중 횡령을 위해 어디로 이어지지도 못하고 아무 데에나 만들어진 계단들은 도시의 복잡함을 더하기에 충분한 요소였다. 길을 찾기 위해서는 계단을 잘 골라야 한다. 괜히 힘만 들고 가려던 곳엔 가지도 못할 테니까.

 

그러나 골목에 숨어 패거리를 꾸민 꼬마쥐들에게 계단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대단히 매력적이었다. 작은 체구로 계단 난간을 잡고 몸을 가볍게 움직이면 공간의 한계를 초월해 그들은 어디로든 달아날 수 있었다. 그리고 난분분 흩어져 제대로 잡기 어려운 꼬마쥐들 중 머리 굵고 또래에 비해 한 뼘 넘게 큰 소년은 자연스레 그들의 대장 격으로 행동하곤 했다.

 

이를 테면 이번의 동전도 그렇다. 메이레이는 사람의 비위를 잘 맞추지 못하는 대신 유달리 빠른 발과 작은 몸으로 여기저기 숨어들어 남의 이야기 엿듣기를 잘 했다. 소년은 그런 메이레이에게 못된 짓은 그만두라고 윽박지르는 대신 동전을 주고 메이레이가 가져온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면 메이레이는 굶지 않아도 됐다.

2023.12.06 13:14 # reply

 

 

창백하고 턱이 뾰족한 얼굴, 초연하게 타인의 손목을 잘라내는 손짓을 보고 있으면 알 수 없는 충동이 끓었다. 제정신이 아니라니까, 하고 들려오는 타박도 새삼스럽지 않다는 듯 웃어 넘겼다. 글쎄, 어쩌면 지극히 제정신이라 가능한 판단일지도 모르지. 태연자약하게 대꾸하면 이해하기 어렵다는 시선이 돌아왔다. 잘 닦인 도구잖아? 그런 걸 쓸모없게 만들어버리는 게 즐거운 거라고. 그 후에 주워다 다시 한 번 벼려서…

 

쓸모를 찾는 거지.

 

 

*

 

 

불야성의 거리는 연기처럼 몰려드는 사람으로 매캐했다. 네온사인의 빛을 피해 들끓는 쥐새끼들과 계절에 맞지 않는 차림새로 눈이 풀린 중독자들, 그 중에도 악질은 머리와 몸통, 꼬리를 완성하며 몇날 며칠을 자리에서 비킬 줄 모르는 도박쟁이들이다. 오늘도 거리의 정경은 크게 다르지 않다. 


"타오."

"링쥔, 여기까지 온 거야? 대범하네."

"타오가 이거, 필요하다고 해서."

 

사람의 틈을 간신히 비집고 들어온 여자애가 내민 것은 손질이 끝난 장도 한 자루였다. 본디 두 자루가 한 쌍인데, 까닭이 있어 대장간에 맡긴 것을 링쥔이 찾아온 것이다. 사람에게 휩쓸려 얼굴 가장자리를 따라 까만 머리카락이 들러붙어 있었다. 타오옌은 주머니에서 담배곽 하나를 꺼내 건네주었다. 링쥔의 눈이 반짝였다.

 

"어디 갖다주는지 알지?"

"응. 고기 살 거야."
"슌에게 먹이려고?"

"샤오슌, 더 커야 하니까."

"다 컸네, 링쥔. 이제 타오는 필요 없지?"

 

그게 아니라고 화들짝 놀라 머리 젓는 아이의 어깨를 떠민다. 알겠으니 얼른 돌아가, 곧 사냥이 시작된다. 뱀의 속삭임 같은 목소리에 멍해졌던 링쥔은 담배곽을 꼭 쥐고 도로 인파로 뛰어들었다. 물결은 흘러흘러 어디를 향하나, 한 자루를 마저 허리에 차며 남자가 걸음을 옮겼다. 장강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내니… 읊조리는 말은 호기로웠으나 흔들리는 긴 머리타래도 사람의 틈새로 사라진다.

 

 

*

 

 

모래톱 여울에 스러진 앞물결을 애도하는가?

남자는 타인을 애도할 줄 모르는 인간은 아니었으나, 필요에 따라 간극을 조정할 줄 아는 인간이었다. 휴대전화 너머로는 주 선생의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걸음이 이어진다. 바닥에 쓰러진 사람의 어깨를 발로 툭 밀어 얼굴에 드리운 죽음을 확인한다. 리정이군. 타오옌은 그의 동생을 잘 알았다. 제 형과 단단히 틀어져 경찰 나으리로 사느라 바빴다.

"…이봐, 타오옌. 듣고 있는 건가? 반드시 11시 25분까지는 나와야 해… 더 늦어지면 아무리 나라도 무리야."

"알겠다고 몇 번을 말해야 아는 거야. 옆에 하이옌이지? 떽떽거리는 게 똑같다."

 

곧바로 날카로운 목소리가 자리를 교대했다.

"알면 제때 집에 좀 들어와. 작작 쏘다니라고. 언제까지 뒤나 봐줘야겠어?"

"누가 봐달랬나. 자청해서 일 맡는 것도 재주야."

"진짜 짜증나!"

"걱정해줘서 눈물겹다. 이만 끊어!"

 

여동생을 실컷 놀린 타오옌도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숨을 돌렸다. 슌에게 온 문자를 확인하자 이후의 길을 안내하고 있었다. 사람을 안내자로 들이기엔 못 미더운 게 많다던가. 불확실성을 이야기했던 것도 같다. 어찌되었든 좋다. 아슌은 이제껏 일을 틀린 적이 없었으니까. 링쥔이 걱정하는 그 이상으로, 아슌은 탁월한 중재자였다. 야광으로 빛나는 페인트를 따라 걷는다. 어리고 병약하지만 그렇다고 누구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 아슌이 협조한 일이다. 내일부터 성채는 한 쪽 모서리를 잃고 무너져 내릴 것이다. 많은 이가 오래도록 염원해온 순간이었다. 혹은 그렇게 시늉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자신만이 잘 해내면 되는 일. 따라서,

 

작은 도살자를 마주친 것은 필연이다.

 

 

*

 

人生無根蒂

뿌리 없이 살아가는 사람아

飄如陌上塵

길 위의 먼지마냥 떠도는데

分散逐風轉

흩어져 바람에 맴도는 탓에

此已非常身

이 몸도 과거의 내가 아니네

 

 

*

 

 

옛날엔… 호간이라는 조직의 일원이었다는 소문이 들렸다. 서로를 애도하고 섧게 여긴다지. 어떤 소문은 믿을 것이 되지 못했지만, 적어도 창백한 낯을 보자면 그리 틀렸다고 느껴지지는 않았다. 칼과 칼이 맞닿아 튄 불똥이 희미하게 눈을 비추었다. 남자는 건너편의 눈에서 오래된 절망과 무기질 같은 분노를 본다. 썩 좋은 방식으로 여기 뿌리 뻗지는 못했음을 알았다. 타오옌은 그런 족속들의 균형을 깨트리는 법도 잘 알았다. 이젠 여기밖에 없다고 믿겠지, 잃은 것을 품고 있겠지. 그러면서도 간절히 지킨 모든 가치를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 때, 그들은 분노하고 무너진다. 

 

몇 번이고 배신해. 살아남는 것보다 중요한 게 있어? 아니면 뭘 애도하나?

닥쳐라. 그 가치를 네놈 따위가 알 턱 없지.

좋은 의사를 알려줄 테니 예민하게 반응하진 마. 아니지, 필요한 건 고철상 쪽이려나.

 

이어지는 조롱에 날카로운 칼날이 달려든다. 그러나 직전과는 달리 전혀 계산되지 못한 움직임이다. 그 자리 말야, 다른 놈은 거기 없었을 것 같아? 물론 생존을 위해 수거되어 가치를 증명해야 했던 여자는 아주 잘 알고 있다. 모래톱에 부딪히지 않으려, 밀려나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버텨야 하던 나날, 무정함을 겉에 두르고 무엇 하나 마음에 들이지 않아야 했던 매 초를. 그러나 허점을 찔러오는 칼날이 매서웠다. 불꽃처럼 쏟아지는 난무는 처참하다. 오래도록 외면했던 고통이 스쳐온다.

 

"언제까지 고여 있으려고."

"네놈이 뭘 알아…!"

"네가 자른 손목의 주인들은 잘 알지. 단순한 도박이 아니었잖아… 알고 있었지?"
 

그가 속삭인다. 살기 위해 했던 것들이야. 넌 그걸 외면했어. 손목을 베어내고 죄를 물었지. 하지만. 시체 같은 여자를 향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잘 벼려진 채다. 정말로 죄를 물어야 했던 건 그 남자 쪽이야. 리웨이가 왜 리정을 두고 갔는지 넌 모르잖아. 주 선생이 어쩌다 며느리와 손자를 모두 잃었는지도 모르잖아. 마약을 값싸게 유통시킨 건 어느 쪽이지? 돈의 가치를 몰락시킨 건? 사람으로 남기 위해 팔지 말아야 하는 것까지 팔아넘기게 만든 건 누가 내린 결정이었다고 생각해.

 

드리운 낚시 바늘들, 단 하나라도 걸리면 그대로 현실에 내동댕이쳐지고 만다. 쏟아지는 위협에 거리를 벌리고 타오르는 검은 눈을 노려본다. 이미 잃어버린 것 투성이다. 저런 말에 무너질 수는, 목적을 잃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뱀이 발목을 기어오른다.

 

 

*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엇 하나 마음에 들일 여유가 없었다. 틈새를 비집고 드는 것은 모조리 피비린내가 났다. 눈을 마주치면 간절한 애원이 스며들었으나 외면해야만 했다. 그렇다면 흰 뼈와 붉은 살의 단면이 차라리 나았다. 그러나 저 목소리는 멈추지 않고 그의 마음을 헤집어 놓았다. 리정이고 리웨이고 모르는 이름 뿐, 주 선생의 며느리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그 손자의 눈을 본 적도 없다. 어둠 속에서 나타난 남자의 목을 저며버리면 아주 조용해질 것인가, 이 술렁이는 심장의 맥박을 가라앉힐 수 있는가? 이 피투성이의 현장에서, 책임자는 대체 누가 될 것인지조차 알 수 없다. 손가락, 검을 쥔 손가락이 시야에 들어온다. 온전하지 못하다. 이미 오래 전 잃어버렸다. 완전함이라고는… 뿌리내렸던 결속을 잃어버린 그 끝은 이렇다. 간절하게 놈의 목을 겨냥해도 오히려 그것을 예측했다는 듯 칼날을 쳐낸다. 불똥이 튀고 날카로운 파공음이 스친다. 제발 죽어, 죽어줘, 그만 나를 뒤흔들어… 한 조각 비명도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맹목적으로 오랜 시간 몸에 습득한 행동만을 반복한다. 이조차도 잃은 과거의 흔적이다. 균형을 잃고 호흡을 가다듬지 못했던 대가로 숨이 희미하게 차기 시작했다. 

 

"슬슬 끝낼 때야."

 

대답하지 않아도 남자는 계속 지껄인다. 맞대응해 체력을 고갈하는 대신 물리적 저항을 지속한다. 남자가 꺼내든 양손의 장검 사이로 교묘하게 그의 칼날을 붙잡는다. 속삭임이 이어진다. 경찰이 오고 있거든. 증거와 함께 고발이 접수되었어. 네 이름으로.

 

불현듯 고개를 든다. 검은 눈이 웃고 있다.

 

"이, 개자식이…!"

"그렇게 말하면 섭해. 대가를 치뤄야지, 무쿠로."

 

기어코 이름이 불린다.

인간으로 살아남기를 포기하고, 한 마리 번견이 되는 까닭에 외면했던 것이.

 

여자는 끝을 직감했다.

 

 

*

 

 

바깥에서는 사이렌 소리가 시끄러웠다. 남자가 가까스로 몸을 빼낸 것은 11시 25분을 조금 넘긴 때였다. 본래 그 전에 돌입해야 했던 특임대였으나, 근처에서 환자를 수송하기 위해 이동하던 소방차와 약간의 문제가 생겨 무법자처럼 돌진할 수 없었다. 뭐, 차를 두고 올 순 없었겠지. 안에서 장비를 갖춰야 하니까. 남자는 건물에서 빠져나와, 골목 틈새에서 몰락의 정경을 지켜본다.

 

"이럴 줄 알았지, 주 선생은 다 방도가 있다고."

 

어깨 위에선 너덜거려 반쯤 시체 같은 여자가 매무새 맞지 않는 큰 겉옷에 감싸인 채 꿈틀거린다. 마지막 칼날이 목을 스쳤던 탓에 따끔했다. 냅다 이마를 들이박아 머리도 징징 울렸다. 그러나 남은 상처에도 불구하고 승리는 그의 손에 쥐어졌다. 무정한 리웨이의 얼굴이 언뜻 보인다. 냉혹하게 지휘하고, 특임대가 건물 안으로 진입한다. 저기 남아있었더라면 단단히 큰 낭패를 보았을 것이다. 휴대폰을 꺼내 확인하자 부재중 전화가 여러 통 찍혀 있었다. 때마침 주 선생에게서 다시 전화가 걸려오고 있었다. 받자마자 요란한 목소리가 뒤섞여 귀가 쨍할 지경이었다.

 

"무사하니까 그만 해."

"자네는 매번… 무리라고 했질 않나, 대체 언제까지 이 노인네 간을 졸이려는 게야."

"그래도 손 써줬잖아?"

"그건 샤오슌의 솜씨네. 나중에 병문안 잊지 말고."

"뭐야, 잠깐만. 슌이 직접 갔어? 이건 예상 못 했는데."

"링쥔이 자넬 지나치게 걱정했어."

 

타오옌이 짧게 웃는다. 빌딩 한 층 한 층을 올라가며 한계를 초과한 손전등의 광량이 유리에 부딪힌다. 빛으로 깎아낸 조각상이 있다면 저런 꼴일까. 불이라도 난 듯한 모습이었다.

 

"링쥔도 한동안 심부름 그만 하라고 해. 위험하다."
"아는 놈이 그렇게 부려먹나."

"하하, 나는 부려먹은 게 아니지… 링쥔이 호의를 보여주는 것뿐이잖아."

"링쥔의 보호자가 누구였는지 알면서."

"글쎄, 모르겠는데."

 

건너편에선 마음대로 하라는 듯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참, 리웨이를 봤어."

"…건강해 보이나?"

"깡패놈들 대가리 깨는 건 자신있어 보이던데?"

"쯧……."

 

무사히 들어오기나 하게, 주 선생의 말을 마지막으로 통화는 종료되었다. 코 끝이 시린 어두운 밤, 별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이 도시는 이미 병들었고, 서로 썩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가장 큰 기둥부터 불질러 마땅하지 않겠는가. 어지러운 걸음이 이어진다. 이 다음은 리웨이가 잘 해줄 것이다. 세상이 그것을 원할 것이다. 그가 원치 않더라도. 단순히 형제에 대한 일말의 동정, 혹은 의협심, 혹은 증오만이 남아있더라도.

 

 

타오옌에게 남은 것은 여자의 처분이었다. 이미 적절한 계획을 꾸려두었다. 소문 속에서 푸른 머리를 가진 여자는 결국 복수심을 잊지 못하고 조직을 거꾸러뜨린 채 이 도시의 음지로 숨어들게 될 것이다. 경찰들은 여자를 쫓고, 수배전단을 뿌리겠지. 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보증이 된다. 잔악한 탄압에도, 추악한 명령에도 굴하지 않았다는 증거, 그러나 이제껏 보인 잔혹한 손속으로 인해 외로울 수밖에 없겠지. 너무나 많은 이해관계가 여자를 둘러싸고 있었다.

 

타오옌은 이 여자를 붙잡아줄 수 있는 것이 오직 자신 뿐인 것을 안다. 직접 마주하지 않는 한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러나 누구도 직접 마주하려 하지 않는다. 공포와 불안의 대상일 것이다. 살아가는 한 괴로울 것이다. 고독할 것이다. 외면할 수 없을 것이다. 바로 그 불행이 그가 안배한 선물이다. 행복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이상 불행해지지 않기 위해서… 돌아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전히 빌딩의 유리 너머로 빛이 물결처럼 쏟아지고 있다.

 

"하루에 새벽은 두 번 오질 않으니… 제 때 살아가야지 않겠어."

 

남자는 다시 걸음을 옮긴다. 도시의 깊은 어둠 속으로.

 

 

 

-

 

* 초반부의 '장강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내니' / '모래톱 여울에 스러진 앞물결을 애도하는가?' 문장은 명 말 격언집, '증관현문'의 장강후랑추전랑長江後浪推前浪에서 유래한 현대 격언을 참고하였음을 알림

* 중간의 시와 마지막 대사는 도연명陶渊明의 잡시십이수기일杂诗十二首其一 (전문 : 人生無根蒂/飄如陌上塵/分散逐風轉/此已非常身/落地爲兄弟/何必骨肉親/得歡當作樂/斗酒聚比鄰/盛年不重來/一日難再晨/及時當勉勵/歲月不待人) 을 참조하였음을 알림

2023.12.01 00:07 # reply

 

 

 

와인병 겉면의 라벨은 모서리가 닳아 부스러지고 있고, 책 표지는 오래된 먼지 냄새가 났다. 은은 광택을 잃고 녹슬어 있었다. 무엇 하나 죽어가지 않는 것이 없었다. 모든 것이 스러져 마땅했다. 무덤에서 나온 것 무엇 하나도 삶으로 끼어들 여유는 없다.

 

 

*

 

 

눈이 쏟아진다. 사제에게는 끝없이 바쁜 시기였다. 성탄 전날에는 전야 미사를, 또한 성탄 당일에는 거룩하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날을 기리고자 세 차례의 미사를 봉헌해야 했다. 남자의 삶은 투쟁과 죽음을 넘나드는 나날이었으나 그의 찬미가는 눈부신 평화와 지극히 높은 곳을 향했다. 새벽 미사가 끝나고 나면 신실한 주민들은 제각기 모여 서로에게 성탄을 축하하는 인사를 나누었다.

그것은 신에게 봉헌된 사제, 아브라함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쏟아지는 선량함을 간신히 맞받아치며 자리를 피하고 나면 비로소 인간 카렐에게도 짧은 여유가 주어졌다. 겉옷을 걸치고 성당 밖으로 걸어나왔다. 외눈의 시야에도 눈은 희게 쏟아지고, 색색으로 장식된 마을 광장의 나무는 자신을 감추지 않았다. 사람들은 서로에게 웃음을 쉽게 내보였고, 마을에 우연히 들른 여행자에게도 기꺼이 상냥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남자는 문득 몸을 일으켰다. 일그러지려는 표정을 잇새 너머로 삼키면서.

 

 

시꺼먼 남자의 팔을 잡아채자 느슨한 눈매 사이의 금빛이 이쪽을 스쳤다. 사제님 친구예요, 하고 천진하게 묻는 아이에게 몰라도 된다며 대꾸하고 자리를 벗어났다. 부끄러워서 그런가봐, 사제님 친구 있어서 다행이다, 자기들끼리 조잘거리며 오해를 쌓아가는 꼬마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앞으로 마을에서 볼 일 없는 쪽이 좋았다. 덩치 큰 시체는 순순히 그에게 끌려왔다.

인적 드문 뒷골목에 내팽개치고서야 유지하던 사람 좋은 얼굴이 흩어졌다.

 

죽고 싶어서 기어내려와? / 그런 표정도 지을 줄 알았나. / 질문에 대답해. / 답을 원하는 질문은 아니지 않나. / 그러면 왜 이런 데에 내려오고 난린데. / 평소와 다르군. 왜 참지?

 

어처구니없는 질문에 사제가 얼굴을 쓸어내렸다. 개자식아, 저녁 미사 있단 말이다… 그것만 아니었다면 그는 충분히 지금이라도 달려들 수 있었다. 겉옷 안쪽을 흘낏 보면 은으로 된 얇은 단검이 여러 자루 걸려 있었다. 안에 걸쳐입은 것은 깔끔하게 다려입은 사제복이었다. 어디 튿어지거나 구멍 난 적 없는 것으로, 재산이라곤 먹고 죽을래도 없는 사제에겐 그나마 새 옷 축에 속했다. 멱을 따고 머리통을 으스러트리고 싶었다. 입김 한 조각 없는 흡혈귀를 산산조각내 땅에 흩뿌리든지, 아니면 바다에 내던져 다신 건너올 수 없게 하든지 하는 것도 좋았을 테다.

그러나 눈 앞의 흡혈귀는 아무 것도 모른다는 듯이, 혹은 그런 것은 아무 상관 없다는 듯이… 아, 하고 사제의 등 뒤, 골목 바깥의 전나무에 시선을 줄 뿐이다. (혹은 그렇게 생각되었다.)

 

무엇 하나 대수롭지 않단 말이지, 네놈에게는. 

참아야 할 이유는 너무 많았다. 하지만 때로 어떤 분노는, 본질적 증오는 그런 것으로는 멈추지 않는다. 품 안의 단검을 잡아채 목을 겨냥해 던진다. 반사적으로 잡아채려던 흡혈귀가 그 재질에 흠칫 멈추고, 사제는 찰나를 노려 다른 단검을 쥔 채 그대로 달려든다.

얼굴을 향해 쏟아지는 단 한 차례의 충동.

디딜 것 없이도 몸을 순간적으로 움직이는 가속은 뛰어나다.

 

그러나 인간의 영역이다. 흡혈귀는 오래도록 그런 이들에게서 살아남아왔다.

던져진 단검은 몸을 제어해 옆으로 휙 트는 것으로 손쉽게 회피, 내리꽂히는 단검 너머의 검은 눈은 예열되지 않았다. 손목을 잡아채 그대로 사제의 몸을 옆으로 내던짐과 동시에 발로 걷어찬다. 움직임을 따라 몸 위에 쌓였던 눈이 흩날린다.

 

흡혈귀는 그 다음 번의 폭력을 이행하는 대신…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섰다. 멈추기에는 지금이 좋았다. 필사적으로 균형을 잡는 사제의,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 노려보는 눈을 마주친다.

 

이봐, 눈이 오는군. / 어쩌자는 건데. / 오늘은 기분 좋은 날이니까… 여기서 그만할까. / 지금 뭘 네 멋대로…! / 저녁 미사 전엔 돌아가지. 선물을 준비할 시간이 필요할 테니.

 

 

헛소리, 라고 대꾸하기도 전 흡혈귀가 몸을 물렸다. 물러서는 방향은 교묘하게도 광장 쪽. 사람들의 빛이 가까웠다. 내가 초대받지 못했다는 건 충분히 이해했으니까. 그저 이 적막함이 좋았을 뿐이라 되뇌이며 그가 마저 물러선다. 다시, 검은 머리카락 위로, 어깨 위로 흰 눈이 쌓인다. 사제는 몸을 일으키며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누구에게도 삶과 죽음은 공평하게 주어졌다. 속죄하는 자의 대속이라 한들 단 한 번 뿐. 그렇기에 저 흡혈귀는 본질적으로 잘못된 존재인 것이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고, 사라지는 것이 옳은데도. 아브라함은 도무지 흡혈귀를 용서할 수 없었다. 사라지지 않으며 기어코 홀로 살아남아 무엇도 자신을 죽일 수 없다 믿는 저 태도도, 권태로움을 이기지 못해 내려다보는 시선도 싫었다.

 

그러나 오늘은 도무지 때가 아니었다. 그가 완전히 내버리지 못한 인간의 삶이 여기 있었고, 그가 신을 대리해 서야 하는 자리가 여기 있었다. 거슬리기 짝이 없는 검은 인영이 멀어져간다. 아이들의 웃음 소리가 들린다. 검은 점이 인간의 삶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아브라함은 오래도록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2023.10.25 09:08 # reply

 

1
당신을 묘사할 수 없습니다 일에 미친 여자는 매일 아침 나를 칼 위에 낳고 춤에 미친 남자는 밤마다 칼을 흔듭니다 무서워서 매일 저녁 입이 돌아가는데
아무 것도 발음 할 수 없습니다

나는 귓속말의 세계에서 제외되었습니다

(달이 뚝 떨어지는 난생처음의 새벽
어쩌자고 이런 쓸쓸한 날에
목이 긴 나의 귀부인은 열차를 타고
불같은 기관사를 사랑하게 되었을까)

 

2
텅 빈 지하실,
검은 염소는 밤새 뒤척거리다... 뭘 할까 달력을 먹고 엽서를 쓴다
한번도 만난 적 없는
 
니노셋게르미타바샤 제르니고코티카에게.

그날 밤 나는 그곳에 있었어 불길이 번져 가는 과수원 어지럽게 널린 사다리들 고무 손을 단 수확용 장대들이 아름답게 불타오르고 환호성이 터졌지 가지마다의 붉은 열매들은 퉤퉤퉤 씨를 뱉었어 절연節煙에 박차를 가했어 그러나 우리는 불 속에 있었고 먼 숲으로부터의 새벽은 오지 않았어 비명이 터졌지 뜨거운 혓바닥에 치를 떨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는 달을 엉망진창으로 묘사했어 한밤의, 서서히 잿더미로 변해 가는 과수원 어둠 속에서 누군가 나무라는 투로 말했어 컷! 컷! 나는 그만 장면 속에서 제외되었고 나는 텅 빈 지하실에 있어 니노셋게르미타바샤 제르니고코티카야 열차를 타지마 누구의 잘못도 아니야 나는 텅 빈 지하실에도 있어 열차를 타선 안돼 진짜 장면은 너의 안에 있어

 

3
매일 아침 주름 투성이의 여자는 바구니 가득 붉은 열매를 주워 담았습니다
밤마다 스텝을 밟으며 춤에 미친 남자는 바구니를 통째로 집어삼키고 자꾸만 키가 자랐습니다
당신을 묘사할 수 없는 날들
무서워서 매일 저녁 코가 돌아가는데
어떻게 당신을!
 
나는 부드러운 입맞춤의 세계에서 제외되었습니다

(달이 뚝 떨어지는 난생처음의 새벽
어쩌자고 이런 쓸쓸한 날에
목이 긴 나의 귀부인은 열차를 타고
불같은 기관사의 손에 살해당해야 하는 걸까)

 

4
붉은 스타킹을 뒤집어쓴 남자는 뭘 할까... 아령을 먹고 부고訃告를 쓴다
한번도 만난 적 없는

안녕 검은 염소야.

너는 걷고 나는 달리지 너는 눕지만 나는 춤춘다 너는 차갑고 틀렸어 그러나 나는 옳고 뜨겁다 어쩔텐가 진짜 장면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걸 사라진 나라 사라진 이름 네가 보낸 엽서는 당분간 내가 간직할게 울지마 끝났어 컷! 컷!

 

황병승, <니노셋게르미타바샤 제르니고코티카>

write 230919

2023.09.19 23:11 # reply

    2013.12.22 백업_별들의 밤
 

 여기는 우주. 별과 별이 노래하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나요? 나는 우주를 걷는 여행자. 지금은 블랙홀이 되어버린 어느 늙은 별, 그가 준 이름의 뜻은 즐거운 외로움. 그 이름을 말하는 법은 잊어버렸지만 뜻만큼은 아직도 내 심장을 뛰게 합니다.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밟아 나아가는 길. 오늘은 어떤 별의 목소리를 들어볼까요. 다만 누군가의 소리를 듣는다고 해서 내가 곧장 답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그저 여행자, 그 어느 별에도 오래 머무를 수 없는 떠돌이. 누구의 일에도 손 뻗지 못하고 한 걸음 뒤에서 지켜보는 방관자. 우주의 온도가 몇 도니 어쩌니 하고 서로들 말한대도 내게는 느껴지지 않는 걸요.
 
 물 위를 걸어본 적이 있나요? 나는 물 대신 우주를 걸어요. 내 발걸음마다 울려퍼지는 파동이 발 밑으로 보이는 저 끝없는 우주를 신기루로 보이게 만들어요. 그저 스치는 걸음마다 겹치며 사라지는 동심원들, 그리고 귓가로는 내 걸음을 알고 노래하기 시작하는 별들. 그들의 목소리는 노래가 되어 돌아와요. 나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는 불완전한 관찰자. 그렇기 때문에 나는 영원히 자라지 못하죠. 다른 것을 이해할 수 없는 여행자가 자랄 수 있다니, 그거야말로 바보같은 말이 아닌가요. 그래서 또 다른 내 이름은 어린 왕자. 그 이름은 누가 주었는지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만 여태까지도 간혹 내 마음을 울려주는 이름 중 하나입니다.
 
 다만 우주는 넓고 광활한 시간들. 우주를 모두 들은 자는 아직 없다고 합니다. 한 번의 탄생으로는 백 중의 하나도 다 돌아볼 수 없는 그런 곳입니다. 과거와 미래가 갈라지는 순간 수많은 장소가 번져 흐르고 작은 소우주들이 눈을 뜨면 또 새로운 세상이 나타납니다. 아무리 보고 걸어도 모자란 이 이름. 그러고 보니 갓 태어났던 별이 내게 주었던 이름이 생각납니다. 그는 내게 밤의 산책자라는 이름을 주었지요. 그러나 그가 지어준 이름이 빠르게 식은 까닭은 내가 아직 밤도 낮도 맞이하지 않았을 뿐더러 둘 중 누구도 나를 만나러 와주지 않아, 단어만 알고 있을 뿐 그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네. 여행자의 우주는 낮도 밤도 찾아오지 않는 시간, 멎어버린 시계바늘과 같습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그 이름은 내 핏줄에서 금방 도망치고 말았습이다. 나는 다만 처음으로 이름이 식는 것을 겁내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여행자의 밤은 별들의 틈에 몸 뉘일 때에나 찾아오는 공허.
 
 머플러가 휘날리면 근처에 블랙홀이 있다는 얘기겠지요. 나는 날리는 머리카락을 가만 두었습니다. 아무렴 어떨까요, 바람을 타고 흐르는 기계도 있다지 않습니까. 바람을 흐르는 기계는 어느 별이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간만에 이야기가 통했던 그 별은 자신의 이름을 어머니라고 했습니다만, 내가 보기에는 아직 덜 자란 어린 아이 같았습니다. 마음 속에 무슨 설움과 아픔이 그리 많은지 계속 터지기만 하더군요. 그 별은 내게 걷는 도서관이라는 이름을 주었습니다. 그는 나와 많은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홍염을 홀로 터트렸습니다. 공허를 불태우는 별은 아름다웠어요. 그와 함께 살아가는 어린 것들을 눈에 담아볼 수 있음이 즐거웠던 순간이었습니다. 그는 또 나에게 온통 빛나는 별도 소개해주었는데, 내 운명의 지침은 거기로 향하지 않아 나는 그 별의 가까이로 여행을 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남긴 내 이름은 아직도 서넛의 별을 더 만날 수 있을 만큼이나 뛰고 있습니다.
 
 별들이 모두 이름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운이 좋을 때에는 셋을 방문하면 하나가 이름을 주지만, 나쁠 때에는 일곱을 만나도 주지 않는 것이 이름이에요. 게다가 별이 여행자를 온전하게 받아들이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이상 그 이름은 쉬이 식어버리고 말아요. 그래서 우리는 늘 바쁘게 걷습니다. 아직까지도 이 우주를 전부 맛본 여행자는 없지요. 물론 우리는 평행을 걸어 얼굴 마주할 일도 없으니 서로의 기록을 나눌 일도 없구요. 단지 우리가 아는 것은 새로운 여행자의 탄생과 이름이 다한 여행자의 죽음 뿐, 그 외의 어떤 것도 공유할 수 없는 평생의 외로움. 그러나 이 여행은 영원히 즐거울 것이 당연하기에 나는 여전히 최초의 이름을 마음에 품고 있어요. 즐거운 외로움.
 
 혈관을 흐르는 이름들이 함께 했던 이야기를 속삭입니다. 우리는 이름 없이 태어나 수많은 이름들이 울려주는 심장의 박동으로 생을 부지합니다. 누구에게도 이름을 받지 못하는 날에서야 비로소 동력원을 멈추고 별들의 사이, 공허의 틈에 몸을 누인 채 모든 것의 여행을 마칩니다. 그 날의 끝까지 나는 걷습니다. 또한 여행자들은 걷습니다. 모두 제각기의 길을 가지고 있어 흔들리는 동심원이 각자의 걸음을 따라 피어나는 모양새. 그러나 그 동심원 위의 물건이 다른 곳으로 나아가지는 못하는 것처럼 우리는 다른 길로 도망칠 수 없어요. 여행자에게 운명이란 갈대에게 불어오는 바람과도 같아 그저 바람 부는 대로 이리 눕고 저리 눕습니다. 그러나 아픔은 없는 길. 후회도 없는 길. 다만 뒤를 돌아볼 수 없기에.
 
머플러가 휘날렸습니다. 오늘도 별들의 노래가 귓가를 덮는 길에 걸음 따라 두근거리는 이름들. 그리고 나는 걷습니다. 

 

2014.01.08 백업_트위터 단문

 

불이 타오른다. 바작거리며 장작을 살라먹는 빛에 홀린 듯이 날벌레들이 나부껴 바스라지고 재가 된다. 주변은 하얀 자작나무 숲. 어둠 속에서 오로지 위를 향해 타오르는 불을 따라 고개를 들면 하늘은 유려하게 흐르는 별빛의 강. 밤의 호흡이 느리게 이어진다. 숨을 천천히 토해낸다. 마음이 버겁게 차올랐다.

 

 

write 230915

2023.09.15 01:04 # reply

 

 

 

 벽에 탄환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다. 그런 시대다. 바닥에 내려놓았던 운동 기구의 흔적은 그렇다 쳐도. 형사는 기꺼이 그 방을 자신에게 내주었다. 익숙해진 공간을 바꾼다는 건 번거로운 일이 아니던가? 형사의 옆에선 누리는 혜택이 많았다. 형사를 따라다니며 보는, 보편적으로 기체들이 겪는 일을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과거의 편린, 집 안의 잔재, 한 사람 분의 생활, 거기서부터 상대가 용납할 수 있는 만큼만 알아간다. 하루 분량, 일주일 분량, 한 달, 그리고 1년.

 

 레오라고 불리울 때에는 해야 할 일이 단순했는데, 형사는 그에게 그 이상을 필요로 한다. 그러니 그는 면밀하게 관찰하는 법을 배워야 하고, 사람의 상처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도, 법이 어떻게 이 사회를 규정하는지도… 규칙은 자꾸만 쌓이고, 작은 방 안은 그럴싸한 한 명 분의 공간이 되었다. 책상 위의 작은 가챠퐁들은 순서를 모르고 중복되어도 버려지지 않는다. 커다란 인형의 자리는 때때로 그를 대신해 의자에 앉았다가, 침대에 누웠다가, 책을 읽는 시늉을 했다. 형사는 그 모습을 보며 묘한 표정을 짓는 것이 다였다. 이상한가요, 하고 물어보면 그래, 하고 돌아오는 짧은 답.

 

 시간은 흘러서 어느덧 오늘. 여기 선 내게 존재하는 건 과분한 이름, 당신의 검. 이가 빠지지 않도록 날을 세워야 할 텐데, 그리운 이들은 저 편에, 당신이 아는 것은 고작 팔로 가득 안은 만큼의 둘레. 난 그 이상을 알아, 그런데도 당신을 알고 싶어져, 당신이 용납할 수 없는 부분에서, 나를 어디까지 용서할지를. 타치바나 츠루기는 도무지 그에게 날을 세울 수가 없었다. 서로가 모르는 과거의 흔적이 있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어, 자꾸 그 너머를 훔쳐보고 싶었다. 규칙의 벽을 넘어서서….

 

 

 

 다시 오늘에 다다른다. 여전히 타치바나의 검은 할 수 있는 것을 고려한다. 필요를 찾는다. 날을 세우기는 진작 글렀다. 눈을 감고 달아나기엔 너무 늦었다. 애초에 그런 것을 용납할 수 있을 리 없다. 당신에게 물었다. 대답할 수 없으면서도.

 

밀고도 배신도 없는 게 맞느냐고.

당신은 명령도 규칙도 없다고 말했다.

어쩌면 이미 필요의 방아쇠는 그 때 당겨졌던 것이다…….

write 230731

2023.07.31 10:46 # reply

데릭리안

조직 잠입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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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년의 세월을 담고 있을 오동나무 문짝을 지난다. 고작 일주일 전에 새로 간 문짝이다. 문 너머의 도련님은 탄환 자국 따위를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는 종류의 인간은 되지 못했다. 애초에 후계자도 되지 못한 인간이다. 어지간한 사유가 아니고서야 범죄자들은 특유의 폐쇄성으로 집단 내에서의 규율을 따르기를 선호한다. 설령 갈아엎는다 해도 우두머리가 바뀔 뿐 기존의 법과 규칙은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따라서, 혈통에 따른 권위를 두고서도 후계자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상당한 '하자'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데릭 디에즈는 그런 상부의 판단에 의거해 조직으로 잠입했다. 

 

태생적 한계라고는 해도, 뒷골목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이런 곳에 잘도 집어넣는단 말이지.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남자는 반듯한 자세를 유지했다. 상부에서의 판단은 곧잘 틀리곤 하는데, 책상 앞에 앉아 보고서로만 사람을 파악하려 하니 어쩔 수 없다고는 생각했다. 그러나 데릭 디에즈는 이 정도는 좀 제대로 파악해줬으면 안 되느냐고 닿지 않을 투덜거림을 이어갔다. 눈 앞의 청년은 잘 조형된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 썩 좋아보이지는 않았다. 의기소침한 모습이 조직원들 말마따나 후계자 감은 못 됐다. 특별히 하자가 있거나, 망나니라서가 아니라... 아니지, 이런 경우엔 저런 성격을 하자라고 할 수 있을까. 

 

섬세한 인상의 미인이었다. 연주를 위해 바이올린을 손에 들면 더더욱 그랬다. 문외한인 그가 듣기에도 뛰어난 실력이었는데, 그에 반비례하듯 집단을 이끌어나갈 카리스마 같은 것은 없었다. 차라리 하나의 집단을 장식하는 조각상에 가까웠다. 법원이든 뭐든 커다란 건물 앞엔 의레 하나씩 놓이곤 하는 그것. 그러나 압도적이라기보다는 미추를 먼저 논하게 됐다. 그림자 드리운 표정 아래에서도. 

 

어차피 언젠가 이 조직을 떠야 한다. 잠입수사란 대체로 그렇다. 어지간히 미치지 않고서야 과거를 버리고 그대로 조직에 소속되어 살아가는 일 따위 벌어지지 않는다. 해야 할일은 어디에든 있었고, 도와야 할 사람은 별처럼 많았다. 그래서인지 아름다운 외관보다도 놀라울 정도로 평범한 내면을 가진 이 사람에 마음이 갔다. 누군가의 도움을 바라고 있었다. 폭력을 무서워했고, 비윤리적인 일은 두려워했다. 식탁에서 시체 몇 구의 이야기가 나오면, 그리고 태연하게 뒷세계의 자질구레한 에피소드가 뛰쳐나올 때면 나이프를 쥔 손은 잠시 멈추곤 했다. 저건 의태일까? 진심일까? 그는 분간하지 못했다. 상부에선 무엇이든 의심하라고 했었고, 그는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었다. 언젠가 떠나야 하니까.

 

어지간히 미치지 않고서야. 누군가의 살상은 언제든 벌어지는 일, 문을 열고 나온다. 창문엔 피가 튀어 있고 문짝엔 납 탄환이 박힌 채다. 시체의 손 끝이 문을 가리킨다. 여길 반드시 들어가야만 했다는 듯. 그러나 들어오지는 못했다. 등 뒤의 사람을 돌아본다. 못 가겠어, 겁에 질려 떨고 있었다. 이런 순간까지도 사람은 의태할 수 있을까? 누군가를 속일 수 있을까? 남자는 그에게 다가갔다. 눈을 마주치면 눈물이 흐른다. 속인다면 속는 수밖에 없다. 하자라면 지나치게 눈부신 금이 아닌가, 틈새로 달빛이 스며드는 것 같다. 그는 자신이 언젠가 떠나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애초에 조직원이 아니었고, 자신 또한 자신이 속해 있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여기에 잠입했다. 상부는 그를 신뢰하고 있고, 그는 돌아가서도 해야 할 일이 많았다. 그에겐 자신만의 집이 있고, 자신만의 생활이 있다. 데릭 디에즈라는 사람을 이루는 가장 사소하고도 평범한 것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이 순간 진심을 담아 말했다. 지켜줄 테니까.

 

젖은 눈이 깜박인다. 창백한 얼굴은 웃지 않는다. 그럼에도 갈 수 있다 말한다. 지금 당장은 그것으로 된 것이다.

write 230716

2023.07.16 05: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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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6

2023.06.26 17: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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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11 19:58 # reply

生年不满百,常怀千岁忧
昼短苦夜长,何不秉烛游
为乐当及时,何能待来兹
愚者爱惜费,但为后世嗤
仙人王子乔,难可与等期

 

작자미상, <生年不满百> (古诗十九首 수록)

 

千岁忧:指很深的忧虑。千岁,多年,时间很长。
秉烛游:犹言作长夜之游。秉,本义为禾把、禾束,引申为动词,意为手拿着、手持。
来兹:就是“来年”。因为草生一年一次,所以训“兹”为“年”,这是引申义。
费:费用,指钱财。嗤:讥笑,嘲笑,此处指轻蔑的笑。
王子乔:古代传说中的仙人。期:本义为约会、约定,这里引申为等待。

 

차후 번역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