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ɴ
   

2023.12.01 00:07 # reply

 

 

 

와인병 겉면의 라벨은 모서리가 닳아 부스러지고 있고, 책 표지는 오래된 먼지 냄새가 났다. 은은 광택을 잃고 녹슬어 있었다. 무엇 하나 죽어가지 않는 것이 없었다. 모든 것이 스러져 마땅했다. 무덤에서 나온 것 무엇 하나도 삶으로 끼어들 여유는 없다.

 

 

*

 

 

눈이 쏟아진다. 사제에게는 끝없이 바쁜 시기였다. 성탄 전날에는 전야 미사를, 또한 성탄 당일에는 거룩하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날을 기리고자 세 차례의 미사를 봉헌해야 했다. 남자의 삶은 투쟁과 죽음을 넘나드는 나날이었으나 그의 찬미가는 눈부신 평화와 지극히 높은 곳을 향했다. 새벽 미사가 끝나고 나면 신실한 주민들은 제각기 모여 서로에게 성탄을 축하하는 인사를 나누었다.

그것은 신에게 봉헌된 사제, 아브라함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쏟아지는 선량함을 간신히 맞받아치며 자리를 피하고 나면 비로소 인간 카렐에게도 짧은 여유가 주어졌다. 겉옷을 걸치고 성당 밖으로 걸어나왔다. 외눈의 시야에도 눈은 희게 쏟아지고, 색색으로 장식된 마을 광장의 나무는 자신을 감추지 않았다. 사람들은 서로에게 웃음을 쉽게 내보였고, 마을에 우연히 들른 여행자에게도 기꺼이 상냥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남자는 문득 몸을 일으켰다. 일그러지려는 표정을 잇새 너머로 삼키면서.

 

 

시꺼먼 남자의 팔을 잡아채자 느슨한 눈매 사이의 금빛이 이쪽을 스쳤다. 사제님 친구예요, 하고 천진하게 묻는 아이에게 몰라도 된다며 대꾸하고 자리를 벗어났다. 부끄러워서 그런가봐, 사제님 친구 있어서 다행이다, 자기들끼리 조잘거리며 오해를 쌓아가는 꼬마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앞으로 마을에서 볼 일 없는 쪽이 좋았다. 덩치 큰 시체는 순순히 그에게 끌려왔다.

인적 드문 뒷골목에 내팽개치고서야 유지하던 사람 좋은 얼굴이 흩어졌다.

 

죽고 싶어서 기어내려와? / 그런 표정도 지을 줄 알았나. / 질문에 대답해. / 답을 원하는 질문은 아니지 않나. / 그러면 왜 이런 데에 내려오고 난린데. / 평소와 다르군. 왜 참지?

 

어처구니없는 질문에 사제가 얼굴을 쓸어내렸다. 개자식아, 저녁 미사 있단 말이다… 그것만 아니었다면 그는 충분히 지금이라도 달려들 수 있었다. 겉옷 안쪽을 흘낏 보면 은으로 된 얇은 단검이 여러 자루 걸려 있었다. 안에 걸쳐입은 것은 깔끔하게 다려입은 사제복이었다. 어디 튿어지거나 구멍 난 적 없는 것으로, 재산이라곤 먹고 죽을래도 없는 사제에겐 그나마 새 옷 축에 속했다. 멱을 따고 머리통을 으스러트리고 싶었다. 입김 한 조각 없는 흡혈귀를 산산조각내 땅에 흩뿌리든지, 아니면 바다에 내던져 다신 건너올 수 없게 하든지 하는 것도 좋았을 테다.

그러나 눈 앞의 흡혈귀는 아무 것도 모른다는 듯이, 혹은 그런 것은 아무 상관 없다는 듯이… 아, 하고 사제의 등 뒤, 골목 바깥의 전나무에 시선을 줄 뿐이다. (혹은 그렇게 생각되었다.)

 

무엇 하나 대수롭지 않단 말이지, 네놈에게는. 

참아야 할 이유는 너무 많았다. 하지만 때로 어떤 분노는, 본질적 증오는 그런 것으로는 멈추지 않는다. 품 안의 단검을 잡아채 목을 겨냥해 던진다. 반사적으로 잡아채려던 흡혈귀가 그 재질에 흠칫 멈추고, 사제는 찰나를 노려 다른 단검을 쥔 채 그대로 달려든다.

얼굴을 향해 쏟아지는 단 한 차례의 충동.

디딜 것 없이도 몸을 순간적으로 움직이는 가속은 뛰어나다.

 

그러나 인간의 영역이다. 흡혈귀는 오래도록 그런 이들에게서 살아남아왔다.

던져진 단검은 몸을 제어해 옆으로 휙 트는 것으로 손쉽게 회피, 내리꽂히는 단검 너머의 검은 눈은 예열되지 않았다. 손목을 잡아채 그대로 사제의 몸을 옆으로 내던짐과 동시에 발로 걷어찬다. 움직임을 따라 몸 위에 쌓였던 눈이 흩날린다.

 

흡혈귀는 그 다음 번의 폭력을 이행하는 대신…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섰다. 멈추기에는 지금이 좋았다. 필사적으로 균형을 잡는 사제의,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 노려보는 눈을 마주친다.

 

이봐, 눈이 오는군. / 어쩌자는 건데. / 오늘은 기분 좋은 날이니까… 여기서 그만할까. / 지금 뭘 네 멋대로…! / 저녁 미사 전엔 돌아가지. 선물을 준비할 시간이 필요할 테니.

 

 

헛소리, 라고 대꾸하기도 전 흡혈귀가 몸을 물렸다. 물러서는 방향은 교묘하게도 광장 쪽. 사람들의 빛이 가까웠다. 내가 초대받지 못했다는 건 충분히 이해했으니까. 그저 이 적막함이 좋았을 뿐이라 되뇌이며 그가 마저 물러선다. 다시, 검은 머리카락 위로, 어깨 위로 흰 눈이 쌓인다. 사제는 몸을 일으키며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누구에게도 삶과 죽음은 공평하게 주어졌다. 속죄하는 자의 대속이라 한들 단 한 번 뿐. 그렇기에 저 흡혈귀는 본질적으로 잘못된 존재인 것이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고, 사라지는 것이 옳은데도. 아브라함은 도무지 흡혈귀를 용서할 수 없었다. 사라지지 않으며 기어코 홀로 살아남아 무엇도 자신을 죽일 수 없다 믿는 저 태도도, 권태로움을 이기지 못해 내려다보는 시선도 싫었다.

 

그러나 오늘은 도무지 때가 아니었다. 그가 완전히 내버리지 못한 인간의 삶이 여기 있었고, 그가 신을 대리해 서야 하는 자리가 여기 있었다. 거슬리기 짝이 없는 검은 인영이 멀어져간다. 아이들의 웃음 소리가 들린다. 검은 점이 인간의 삶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아브라함은 오래도록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