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 back memo guest
   
ɴ
   

 

"살아갈 의지가 있다면 어디라도 천국이 돼…

 왜냐면 살아있으니까…

 행복해질 수 있는 기회는 어디에라도 있어."

write 230220

2023.02.20 13:25 # reply

 

 

 

 창 밖에선 새가 호르르 울고 있다. 깃 색도 어둡고 육식성이 많아 잡아봤자 빈한 살엔 짐승 냄새만 깊게 배어 그저 개고생. 흐리멍텅한 달 모양을 보아하니 내일 날씨는 궂을 것이다. 뭐, 날이 궂든 어쩌든 날 좋아하는 저 녀석도 계속 같이 다니겠지. 집이 없다는 건 그런 거다. 하루하루의 변화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 떠돌 수밖에 없는 것. 그는 중요한 것들을 되새긴다.

 

 남자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은 잊었지만 정말로 중요한 것들은 기억하고 있었다. 요는, 필요와 불필요의 영역이다. 일행이 버섯 요리를 좋아하는지 좋아하지 않는지, 무엇을 무서워하는지, 방금 어떤 내기를 주고 받았는지 같은 것은 실은 불필요하다. 어차피 버섯 같은 건 모험 중에 따먹을 게 못 되고-그는 버섯을 잘못 먹어 죽은 인간을 여럿 봤다. 마음에 안 드는 놈의 밥그릇에 아무 버섯이나 쥐어뜯어다 처넣으라고 했던 미친 약재사 놈도 하나 알고 있었다.- 무서워하는 것은 대체로 칼로 해결되었으며 정말로 중요한 것은 내기에 걸지 않았다.

 

 우리는 돌아갈 곳이 없다. 남자는 자신 혼자만이라면 이제껏 그랬듯 떠돌고, 누군가의 목적을 대신 수행해주고, 그리고 밥벌이를 하고 적당한 곳에 누워 한 숨 자는 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한다. 날이 좋던 어느 날 떠나왔던 그 때와 여전히 같은 마음이다. 하지만 좋아한다니 할 수 있는 선에선 최선을 다해야 하는 셈이다. 이제껏 누구 하나 곁에 머무르지 않은 것도 아니다. 돌아갈 곳이 있는 이들은 돌아가야 할 곳으로 보내주고, 무언가를 잃어버린 이들에게는 잃어버린 것을 찾아주었다. 자, 그러니 상대를 위해선 언젠가는 집을 사야겠다. 계속 떠돌 수만은 없으므로.

 

 그는 기약 없는 최선을 아주 먼 미래로 밀어놓는다. 그러니 그 때까지로 하자. 정말로 중요한 것을 내기에 걸고 싶어지는 순간엔, 이 칼을 네게 걸어도 좋을 것 같은 그 때엔 네게 머무르자. 네가 무슨 음식을 좋아하고 어떤 표정을 짓는지가 내 눈에 들어올 때엔, 네가 무서워하는 것들이 신경쓰이게 될 때엔,

 그 때엔 네게 머무르는 걸 최선으로 할게. 아무리 날이 좋아도.

 

 단, 이 결심은 상대에게 닿지 않는다. 사람의 마음은 알 길 없으리라. 다행스럽게도, 여전히 칼은 휘지 않고 곧게 뻗어나가며 결과는 언제나 명확하다. 당장은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는 그래서 상대의 말에 잠깐의 고민도 없이, 어디든 기억하기 쉬운 게 좋은데, 라고 대꾸했다. 

write 230220

2023.02.20 00:32 # reply

 

 

있지, 거짓말 아닌데. 전투가 끝나고, 대화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뭐가 말입니까? 가죽이 두꺼운 탓에 성긴 박음질로 완성된 바지 위로 핏방울이 튀었다. 검사는 공중에 칼을 휙 털어내고, 바닥에 투둑 떨어진 핏방울 쪽에 잠시 시선을 뒀다가 음유시인을 돌아봤다. 네가 필요하다고 한 거. 그는 어쩐지 턱 막힌 것처럼 말이 없었다. 화려한 악기며 머리의 장식이 무색했다. 공주를 닮아 끄트머리가 희미하게 푸른 머리카락은 길고 치렁한 것이 머리장식과 닮았다, 검사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도로 몸을 돌렸다. 무기질적으로 마물의 입을 열어 두툼하고 뾰족한 엄니를 뽑아내고 이에 붙어난 살점은 손 끝으로 으스러뜨렸다. 엄니들을 주머니에 챙긴 다음엔 발목 뒤쪽의 힘줄을 도려내어 챙겼다. 단검이 재주 좋게 스쳐간 자리엔 뒤늦게 피가 배어나온다. 더 털어먹을 전리품이 없는지 마물의 시체를 발로 휙 뒤집으며 남자가 말을 이었다.

 

봐, 좀 빤질거리긴 하지만 노래도 잘 하고, 목소리도 좋고, 귀도 귀엽고, 사람 대하는 것도 나보단 훨씬 낫지. 그러고 보니 배고프다. 공주님한테 내 비상금도 갚아달라고 할 걸 그랬어. 이거 팔면 그래도 네 밥값은 나오겠다. 검사는 궁시렁대며 칼을 집어넣고 바지에 손을 문질러 닦았다. 손잡이에 익숙하게 손을 얹은 채 얼른 가자, 손짓하면 다소 얼빠진 표정을 짓던 음유시인이 기어코 입을 연다. 당신은 최악이에요. 청명한 목소리가 선언하면 검사는 이윽고 또 억울해져서, 대체 뭐가? 하고 반발했다. 아니, 네가 계속 그런 표정 지어서 말했을 뿐인데 왜?

 

음유시인은 내심 이 인간이 정말 자기 고백을 홀랑 잊고 저런 말이나 지껄이는 게 아닌가 생각했지만 도저히 물어볼 마음은 들지 않았다. 정말이지, 최악의 인간이다. 끔찍해… 무엇보다 최악인 건, 저딴 인간을 졸졸 따라가고 있는 이 상황이지만, 불행히도 사랑이다. 저따위 말이 보답처럼 닿고야 마는, 지독한 짝사랑에 목 매인 채 기어코 걸음을 옮겼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는지부터 가늠해야 할 판이라, 무심하게 지껄이는 남자를 10분은 더 그대로 두어야 했단 것까지 최악 아닌 것이 어디에도 없었다.

write 230206

2023.02.06 15:46 # reply

 

 

 눈이 나부낀다. 와이퍼가 차창을 닦아내느라 바빴다. 차 안에선, 아니, 옆에 앉은 남자에게선 지하실 냄새 같은 게 났다. 그리고 뭔가 탄 것 같은 냄새도. 차는 간간히 덜컹거렸고 그 때마다 차창 가장자리로 밀려난 눈이 미끄러졌다. 택시를 타고 들어오면서는 창 밖의 풍경이 아름답다고만 생각했다. 지금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지만, 걷거나 뛰어 눈길을 헤매는 것보다는 나았다. 남자의 어깨에 기대 창 밖을 응시하면 숲의 정경은 쏜살같이 흘러갔다. 그리고 차가 휙 커브를 돌고… 택시처럼 부드럽게 운행하길 기대한 건 아니지만, 이 정도로 급하게 쏠릴 필요는 없지 않을까? 남자가 자신을 옆에 끼고 있지 않았더라면 창문에 이마를 박든지, 거진 뒷자석에 굴러다니든지 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지금은 안전했다. 여자는 그제야 자신이 잠옷 한 겹 차림이었다는 것을 인지했다. 펜던트 목걸이 하나가 유일한 장식이다. 슬쩍 남자를 곁눈질하면 뺨의 흉터를 지나 까만 눈과 마주쳤다. 자연스럽게 창 밖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별로, 날 이상하게 보는 것 같지는 않은데… 그래도 엉망이겠지. 울다가 주먹질까지 했다. 온실에 다른 사람이 없었다는 것만은 다행이었다. 하지만 총을 겨눴는걸, 뭘 증명해야 하는지도 모르는데 증명하라고나 하고…, 변명과 당위성을 번갈아 생각하다 보면 괜히 민망해졌다. 쿠션으로는 부적합한 남자에게 기댄 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눈을 감는다.

 

 휴대폰은 잃어버렸고, 짐도 되찾을 수 없을 거다. 찾을 수 없다고 대놓고 말을 하진 않았지만 카밀라와 케일 사이의 짧은 대화로 분위기는 파악했다. 잃어버린 것들을 다시 채워가려면 번거롭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속상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슬픈 것은… 남자에게 덮어줬던 코트였다. 좋아하는 코트였다. 조모님의 것이었다. 아주 같은 걸 다시 찾을 순 없을 것이다. 영영 잃어버린 셈이다. 잠옷에 슬리퍼 차림으로 아무 것도 없이… 이제 어쩌지, 생각하고 있으면 차가 급하게 섰다. 놀라 눈을 뜨면 카밀라가 이쪽을 돌아봤다.

"내려요."

"여긴 어딥니까."

"미리 준비해둔 안전한 곳? 이만큼 해줬으니 집은 알아서 가고."

 

"…아, 저기. 감사해요."

 

 문이 열리고, 찬 공기가 스며든다. 내리기 직전 여자는 급하게 카밀라에게 감사인사를 건넸다. 감사할 것까지야, 심드렁하게 대꾸한 카밀라는 홀로 차 안에 남았다. 저 사람이 무슨 사정이 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여자는 그의 대꾸가 어쩐지 조금 젖어있지 않았나, 하고 생각했다. 마을은 작다. 아마도, 그 지네 마을 정도. 그러나 사람이 여럿 나와 있었다. 버스에서도 사람이 하나 둘 내리고 있다. 찬 바람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옆에 선 남자를 보면 그는 막 걸음을 옮기려 한다. 그의 옷깃을 잡아당긴다. 서운하다고 주먹으로 두들긴 상대에게 이런 말을 꺼내는 건 부끄럽지만, 결국….

 

"케일 씨. 저, 추워서…."

 

 추위에 지고 만다. 그는 어쩐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겉옷을 벗어 내주었다. 남자가 벗어준 겉옷은 소매가 남아 돌았고, 무거웠다. 이 옷에 그 때의 그 총이 그대로 들어있는 걸까, 그래서 무거운 걸지도 모른다. 지하실 냄새도 여전히 났다. 옷깃을 잡는 대신 팔짱을 끼고 남자를 따라 걷는다. 슬리퍼 틈새로 눈이 들어와 간혹 발이 시려도 그 때처럼 걷는 게 마냥 힘들지는 않아, 어쩐지 이 사람에게 익숙해진 걸까, 하고 생각한다. 처음처럼 무섭지도 않고, 더 이상 춥지도 않다. 여전히 눈이 나부낀다.

write 230130

2023.01.30 10:59 # reply

 

 남자의 전화는 예기치 못한 시간에 걸려왔다. 여자는 다소 졸음에 취해 누군지도 모르고 전화를 받았고, 낯선 목소리에 잠이 확 깼다. 조금 더 일찍 전화했다면 미안할 일은 없었을 거라고 톡 쏘듯 말하는 대신 "괜찮아요, 무슨 일이라도 있으세요?" 하고 나긋하게 대꾸했다. 뭘 부탁하려는 걸까? 호기심에 대답하듯 남자는 말을 이었다. 어딜 좀, 같이 가주었으면 해서. 여자는 기꺼이 승낙했고 통화는 거기까지였다. 몇 마디 정돈 더 붙일 줄 알았는데.

어딜 가게 되는 걸까? 얼굴을 보지 않은 몇 주 사이 위기감과 두려움은 쏜살같이 사라졌다. 점차 흩어져 갈 손목의 푸른 손자국만이 그가 있던 한 순간을 인지시켰을 뿐이다. 이후 그는 다시 한 번 서점을 찾았다. 아이리스는 이 사람이 홍차를 좋아하지 않는구나 생각하고 커피를 내려왔는데, 이번에도 입을 대지 않아 어쩐지 묘한 오기가 생겼다. 내 손목을 보긴 했을까? 이해는 되지만, 수상한 걸 타진 않았는데…

 

 그래도 재미있는 제안이었다. 호텔 패키지를 예약하고(경험이 없어 조금 헤맸다) 난 후에는 조모님의 방을 탐험하는 시간을 보냈다. 와이드 칼라에 자수가 놓인 아이보리색 코트를 걸치고 연한 갈색의 손토시를 꺼냈다. 베레모 여러 개를 차례로 거울 앞에서 대어보고 있으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왜 이렇게까지 들뜬 걸까? 이 호의를 배신하지 않아서? 하지만 인생에 있어 여자의 호의를 쌀쌀맞게 쳐내는 사람이 오히려 드물었다. 오해가 벌어질지언정 대개는 수용했고, 얼굴에 흉터를 적나라하게 새긴 저 남자도, 아이리스는 그 즈음에서야 그가 자신의 호의를 곧이곧대로 전부 수용하지는 않았음을 깨달았다.

 

 

 여자는 자신을 향한 사람들의 시선이 어떤 방향인지 잘 알았고, 그 편견만큼 실제로 수혜입은 사람이기도 했다. 배려와 안전, 걱정 속에 여자는 (그 스스로는 잘 하고 있다고 믿었지만) 필요 이상의 방비는 하지 않는 버릇이 들었다. 밤마다 뒷문이며 큼지막한 창문의 잠금쇠를 확인하고 잠들지만, 정작 그 유리창을 아주 없애버리거나 그 이상의 보기 흉한 안전장치를 하지 않는 것과 같았다. 누군가 밤길을 뒤따라오거나 혼자 택시를 타며 벌어질 상황에 대해선 염려하지만 카드 기록이 행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드러내보이는 빈 틈에 있어서는 그야말로 어디 걸려 넘어지지 않은 것이 천운이리라.

 조부는 단 한 번도 아이리스에게 그 스스로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걱정을 내비치지 않았고, 약간 오래되었지만 잘 관리된 겉옷에 올 한 번 나간 적 없는 레이스 치마며 구겨질 일 없는 블라우스를 걸친 여자의 인생은 보이는 그대로였다. 뜀박질로 진흙이 점점이 튄 치마를 수선 맡기며 여자는 망가지면 어쩌지, 하고 염려했지만 그야말로 나약한 걱정에 불과했다. 치마는 생각 이상으로 온전하게 수선되었다.

 

그러니까 그 남자는, 위기감 없는 나날에 던져진 파문이었다. 믿어도 되는 걸까? 하고 딴에는 건드리고 관찰해도 충분히 안전하다는 결론만이 났다. 목숨이 걸린 상황에도 지켜줄 것 같은데다, 더 이상 위협하지 않고, 오해하지도 않는다. 이윽고 아이리스는 사두었다가 색이 너무 어두워 걸치지 않은 목도리를 꺼내고, 또 남자에게 무슨 옷을 뒤집어씌워야 보기 좋은 모양새가 날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큰 걱정은 없었다. 좋아하는 치마는 망가지지 않은 채 돌아왔고, 즐겨신는 신발도 구두장이 말로는 큰 문제 없이 수선될 거라고 하지 않았는가…

받은 거

2023.01.30 09: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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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8

2023.01.28 18: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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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ote 230127

2023.01.27 17:04 # reply

미래는 언제나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그 의미를 갖는다.

신일숙, <아르미안의 네 딸들>

write 230123

2023.01.23 21:53 # reply

 

 

 낯선 시야를, 낯선 마을을 빠져나오면 여전히 겨울이었다. 양 뺨이 차갑게 얼어붙는 감각이 그제야 느껴졌다. 거진 끌려가다시피하던 걸음에 발바닥이 욱신거렸다. 남자가 단단하게 짓누른 눈 위의 발자국만 따라 밟고 걸어도 코트의 끝자락은 눈에 엉망으로 젖었고, 보폭 자체가 달라 간간히 눈 사이에 발이 파묻힐 수밖에 없었다. 돌아가면 신발도 코트도 모두 수선을 맡겨야 할 것이다. 잡힌 손을 조금 당겨보았지만 상대는 그가 뒤처진다고 두고 가는 계열의 사람이 아니었다. 말로 꺼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아이리스는 걸음의 향방을 상대에게 맡겨둔 채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쫓아오는 것은 없었다. 이렇게 짧은 시간 내에 계속 뛰어다닌 것이 얼마만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짧게 숨을 내쉬었다. 긴장은 여전했다.

 

"저기, 미안해요, 발이 아파요."

 

 남자가 잠깐 멈췄다. 그가 이쪽을 돌아봤다. 얼굴의 흉터가 무서웠다. 서슴없이 꺼내드는 칼이며 총도 그랬다. 그게 당장 몇 시간 전 이쪽을 향했던 것까지도 선명하다. 자신보다 크고 빠르고 강한 사람에 대한 반사적 두려움까지, 어쩔 도리가 없다. 여자는 자신이 타인에 비해 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사람을 자신이 구했을지언정 지금에 와서 어떻게 대응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여자가 그를 필요 이상으로 경계하지 않아도 될 근거는… 많았다.

 손을 치료해주던 손길, 사과하던 목소리, 보였던 빈 틈에도 불구하고 아무 일 없던 짧은 평화. 자신의 손에 쥐여준 약, 혈청, 남자의 다친 다리, 절뚝거리는 걸음(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보다 빨랐지만), 내가 당신이라면 이런 걸 남에게 쉽게 쥐여주진 않았을 텐데. 아니지, 보다 강하기 때문에 그럴 수 있는 걸까? 충분히 이길 수 있으니까? 징그러운 벌레라든지, 이상한 모습의 괴물이라든지, 그런 것은 때로 비현실적이고, 이 순간에 있어서는 더더욱 그렇다. 다만 그 때, 여자는 그가 자신의 질문에 건성으로 대꾸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사람의 호의는 어디에서 기반하는가? 오해했기 때문에 한 번 이 쪽으로 기울어준 것일까?

 

 많은 생각을 삼키고서 여자는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혹시 모르니까…"

 

 

 

*  *  *

 

 

 

 전봇대가 어렴풋 보이기 시작한 시점에서, 먹통이 되었던 휴대폰이 살아났다. 택시는 보기보다 쉽게 잡혔다. 그가 욕을 내뱉으려다 꾹 참는 것을 봤으니 쉽게,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옆에 험악한 인상의 남자가 하나 있는 까닭에 택시 기사가 이런저런 말을 붙이지 않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혼자였다면 꿋꿋하게 걸어가든지, 경찰을 부르든지 했겠지만… 목적지도 굳이 서점과 거리가 있는 곳으로 지정하지 않아도 되어 좋았다. 택시 안은 따뜻했고, 창 밖의 풍경은 빠르게 스쳐갔다. 얼어붙었던 피부가 녹아가는 것이 느껴졌다. 손등으로 자기 뺨을 문지르며 여자는 짜증과 고통이 뒤섞인 듯한 남자를 흘끗 올려다본다. 

"케일 씨, 옷 말이에요, 두고 와버렸잖아요. 해독제도 혈청도 모두 나한테 줬고. 다리도 다쳤고."

 

 게다가 지갑이 있긴 할까? 물에 잔뜩 젖어서 벗어뒀던 그 겉옷에 들어 있었다면 아마 영영 회수할 수 없겠지……. 그는 남자의 눈을 마주치고, 손을 잡는다. 손목에 이 사람 손자국이 남을까, 남지 않을까? 여자는 전자를 확신한다. 몇 번 붙잡혀본 경험에 의거하자면 제법 오래 남을 텐데, 선의와 죄책감으로 상대를 움직일 수 있을까? 어디까지 움직여줄까. 확신하기 어렵다. 위험한 순간에야 그 많은 근거들이 제 역할을 했지만, 그 무엇도 위협이 되지 않는 상황에도 그는 이 호의를 배반하지 않을까? 수많은 생각이 아슬하게 스쳐간다. 여자가 이 즈음에서 하려는 것은 자신의 안위를 건 일종의 도박이다. 

 

"그러니까… 잠깐만 쉬었다 가세요."

티스토리

2023.01.22 17: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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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 221114

2022.11.14 17:24 # reply

나날은 별다를 것 없는 피안의 연속이다. 잎이 유달리 푸르니 여름일 것이다. 볕 아래 오래도록 서있으면 현기증을 느끼기도 하고, 땀을 줄줄 흘리며 그늘을 찾아 헤매기도 한다. 나츠요는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으므로 그것만으로 계절을 파악하기는 쉽지 않겠으나, 여린 잎은 어느 샌가 쑥 자라 햇빛에 비추어도 건너편이 비치지 않는다. 보송한 솜털도 어디론가 가버린지 오래다. 나츠요가 등을 보인다. 멀리 걷는다. 그렇다. 여름이 걷고 있다.

친근감을 느끼는 대상을 향한 호칭은 요우가 알기로는 비슷한 형태였는데, 진짜 이름 한 토막을 잘라내어 부르는 것이다. 편향된 지식과 체험에 기대어 느끼기로는 이름의 길이란 거리감과 비슷하다. 이름 높은 신일 수록 온갖 방식으로 줄줄이 길게 불리우지 않던가. 이를 테면 어디의 무엇을 다스리는 어떠한 신인 누구라는 것인데, 그 전부가 이름에 해당했다. 이름이 그 정도로 길어지면 도리어 무엇이 자신을 부르는 것인지 알기 어렵지 않은가, 하고 물었더니 요우들은 그렇다, 그렇지, 하고 대답했다. 성씨며 무엇이며 그런 것은 결국 어디에서 태어났는지의 수식이 아닌가,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그 모든 것을 떼어내고 남은 것이다. 그것만이 진짜 이름이다. 무엇보다도 그 쪽이 쉽다.

 

 

미치루는 나츠요를 나츠, 하고 불렀다. 한 토막을 자신이 삼킨 것처럼.

나츠요는 답하지 않았다. 진득한 사과 사탕의 겉에 입이 붙어서인가.

 

아키하, 하고 부르면 가을의 잎이라고 한다. 아키하는 무엇이든 부를 이름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자신이 가을에 태어났으니 아키, 잎 그림자를 닮은 뱀님이 요우님, 그렇게 이름을 잘라주었다. 요우도 그에 관하여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러니까 이를 테면, 말하자면, 사람들은 잎 그림자를 보고 커다란 얼룩이 졌다, 고 말하는 것이다. 염원한 끝에 죽이고 싶은 사람을 죽여놓고, 커다란 뱀이 왔다 갔노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누구도 올려다보지 않는다. 누구도 돌이키지 않는다. 다만 그것을 바라는 까닭이다.

 

아키하를 아키, 하고 부른 적은 없다. 베어물면 가까워진다, 이름은 공물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는 너만을 위하여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은 어려운 방법이다. 너는 우리와 다르고, 우리에게는 많은 것이 고여 있다. 다만 잎의 맥을 따라 색이 바뀌고 바람이 많아지면, 시드는 풀이 늘면 가을을 부르는 법을 되뇐다. 돌아오는 답이 없는 해를 보냈음에도.

 

바라는 마음이 쏟아진다. 바라면 무엇이든 들어준다. 그것이 신이다. 짧은 이름 아래 우리가 고여든다. 그러나 때로는, 틈새로 드는 빛에 찡그리고, 못된 마음만 받아먹는 것은 참으로 싫다고 느끼게 된다. 그 힘이 곧 우리라 한들, 가장 쉬운 방법이라 한들 거기에만 휘둘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게 판단한 이가 있으므로. 요우는 햇빛 아래 오래도록 서있다. 눈은 부시지 않고, 발 아래로 세상이 밟힌다. 발을 타고 개미가 걸어 지나간다. 발치의 잎 하나는 요우에게 가려 바람에 날아가지 않는다. 이 순간 정물과 같다. 차라리 이렇게 굳어져도 좋을 것이나, 아직은 타케가미를 비호해야 한다. 그 끝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싫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렇지, 누군가 죽여달란 소원은 응하지 말라고 했구나. 그 바람은 우리에게도 좋겠다. 싫은 것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여름에는 축제를 한다. 가로마루를 데리고 나가면 좋아할 것이다. 사람이 무척 많을 것이다. 틈새에 섞여드는 셈이다. 사람의 손으로 만든 가면을 씌워주고, 사과 사탕을 쥐여주어야겠다. 사람의 방식을 익히는 것이다. 나츠요의 나츠가 무슨 뜻인지는 물은 적 없으나 비슷한 음을 생각한다. 여름이다.

 

이름이 있다. 그러니 남의 이름을 삼키지 않고도 서로를 부를 수 있는 날이 좋았다. 여전히 나날은 피안의 연속, 계절은 바뀌고 꺾이며 사람의 목숨을 쥐락펴락하건만, 욕망은 타인의 등을 찌르고 달아나건만, 그럼에도 그것은 우리가 하지 않은 것이다. 비로소 한 겹 선을 긋는다. 발치의 잎을 주워든다.

 

저 멀리, 나무 아래서 여름의 잎 그림자를 올려다보는 이가 있다.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는 알아야 하므로.

 

괴물인가, 신인가, 그림자는 여전히 잎의 형태.

write 221112

2022.11.12 02:15 # reply

햇빛이 든다. 뱀은 눈을 감았다 뜬다. 소원의 징조인가, 하고 보면 앳된 얼굴이 이쪽을 들여다본다. 아이가 웃는다. 당시 그것에게 이름은 없었다. 사당에 고인 것은 악의의 응집체다. 외진 곳의 사당을 찾은 노인은 돈을 숨기려다 아들에게 등을 찔려 죽는다. 아들은 아주 커다란 뱀이 있었다 말한다. 이후 비슷한 사례는 반복된다. 사당을 열어 스치는 빛은 이를 테면 탐욕, 소원의 징조. 따라서 뱀의 형태.

아키하의 이름을 기억한다. 그는 이름의 한 글자를 뚝 떼어 뱀에게 먹였다. 아키하, 하고 부르면 보세요, 요우님, 아키와 요우님이라 아키하예요. 하고 말한다. 우리인 것인가. 우리다. 알겠는가. 요우님, 요우님, 공놀이를 가르쳐 드릴게요. 요우님, 이것 보세요. 마을에서 파는 당고예요. 아키하는 오래 머물지 못했으나 여전히 뱀은 요우라는 이름에 모인다. 고여든다.

동그란 떡을 베어문다. 잇새로 물컹거리는 감촉은 몇 번에 걸쳐 으스러지고 이윽고 흡수된다. 몇 번 느리게 씹고 있으면 나츠요가 묻는다. 계속 투영해야 해? 요우는 생각한다. 요우에게 아키하는 유별난 이름이다. 닮은 것들을 아키하의 이름에 묶는 것이다. 투영이라기보다는 분류다, 그것이 삶을 바라보는 형태와 같다. 비슷한 것들은 서로 모인다. 요우는 말한다, 네 뜻대로 생각하거라. 이것이 아닌 듯 나츠요의 미간이 구겨진다.

 

소원은 빌지 않는가.

안 빌 거야.

소원이 있는데도.

됐어, 그건…

 

그렇다면 여전히 타케가미의 일부, 아키하의 일부, 요우는 느릿느릿 미소를 흉내낸다. 나츠요는 푸르다. 타케가미는 이어진다. 햇빛이 든다. 상자가 닫히지 않아 눈이 부시지 않다. 소원의 징조가 틈새로 들지 않는 나날이다.

write 221108

2022.11.08 01:53 # reply

현재의 인연에 대한 심판이란 곧 과거에의 안녕, 여자는 추억을 회상하지 않는다. 정말로 좋아했던 한 순간은 소중하다. 돌이킬 수 없음을 안다. 일말의 가능성이 있을는지도 모르나… 여자는 어딘가 존재할 가능성의 세계 대신 지금 고요와 침묵으로 일관하는 세계를 침범하고 또 파괴하고 배신한 사람들이 싫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파괴와 배반을 눈 감을 수는 없으며, 엄정한 심판의 칼이 여자의 손에 쥐여 있다. 심장을 쥐고 맥동하는 빛은 기어코 모든 것을 놓으리라 말한다. 광오한 빛은 여자를 심판의 잣대로 사용하고자 한다. 오직 한 자루의 칼이 되어.

따라서 누군가를 상처입혔다면, 인간이 인간이기를 포기한다면, 타인의 등에 칼 꽂을 순간을 기다린다면 여자는 그를 기꺼이 살상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질서에 어긋나고, 어긋난 것은 선할 수 없으므로. 이제 남은 것은 당신 뿐. 왜 그렇게 상처 입은 얼굴을 해요? 그러니 묻고 싶은 것이다. 왜 대신 맞았나요? 떨어지라고 외쳤던 그 한 마디. 진실로 타인을 위한 행동인가요? 나를 위한 말이었나요. 당신은 고결한 자인가요? 당신만이 나를 끝까지 붙잡고자 남아 있으므로.

결국 묻고 싶은 것은, 그 모든 말의 뜻은 나를 배반하지 않나요? 단 한 마디.

 

그러나 묻지 않는다. 저울의 영점은 이미 조정되었다.

단번에 베어내기 위하여,

여자의 세계에는 배신도 불신도 존재하지 않는다.

write 221103

2022.11.03 00:18 # reply

금박이 나리운다. 아니, 이건 금박이 아니라 불씨라고 불러야 옳다. 검은 머리채를 늘어뜨린 여자는 그의 작고 초라한 세계와 거리를 두고서도 눈부시게 타오르는 성의 중심을 본다. 꽃들은 떨고 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모르겠어서, 그는 거기에 선 채 잠시 보았던 바깥의 사람을 생각한다. 그가 사랑하기로 *다짐*했던 상대의 얼굴을 그리지만, 그것은 자꾸만 머릿속에서 흩어진다. 모르는 타인의 목소리가 들린다. 몸을 돌린다. 말을 타고 왔으면서도, 훌쩍 말 위에서 몸을 날려 내려온 여자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혀 있다. 그에게선 무언가 타는 듯한 냄새가 난다. 두 눈은 푸르다. 거울 너머에서 본 자신의 눈과는 다르다. 따지자면 먼 이국의 보석과 같은데, 그는 그것을 가지고 싶었지만 총애받지 아니하여 가질 수 없었음을 알고 있다. 사랑받는다는 감각은 무엇일까.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자신을 사랑함을 알고 있다. 그의 아버지가 가진 힘만큼 그의 왕이 자신을 사랑함을 알고 있다. 그는 그의 왕을 사랑하기로 다짐했지만 서로에게 필요한 것이 다르다. 그는 가치를 계산할 줄 몰라 매번 그릇 가득 물을 떠 떨리는 스스로의 손으로 상대에게 들고 가는데, 손이 떨리고 걸려 넘어져 물은 절반도 남지 않는다. 물을 가득 든 사람들의 사이에서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한 줌의 물을 받아들이지 않고, 가득하지 않은 이유를 타박한다. 눈 앞의 여자가 손을 뻗는다. 물이 엎질러질 것 같아요, 여자는 그것을 말하지는 않는다. 어리석은 이를 보는 시선은 슬플 테니. 다만 피어난 꽃으로 시선을 돌린다. 꽃의 이름을 말해주지 않았던 것 같다. 더듬더듬 꽃의 이름을 말한다. 정원의 것들은 여전히 떨고 있는데, 그것이 멀리서부터 들리는 함성 때문인지 불길이 점차 가까워지고 있어서인지는 알기 어렵다. 그는 눈을 돌리지만 상대는 눈을 돌리지 않는다. 어쩌면 이번에도 물은 엎질러졌는데, 또 넘어지고 말았는데 눈 앞의 여자는 그냥 그 그릇을 멀리 던져버리고 싶은 것 같았다. 많은 생각은 한 호흡에 스쳐지나간다. 대신 당신이 후회하면 어쩌죠, 하고 말한다. 여자는 후회하지 않을 거라고 답하고, 그래서 손이 젖어버린 그는 어쩔 도리 없이, 운명처럼, 기어코 금박 흩날리는 세상에서, 무겁고 근육으로 꽉 찬 짐승의 등에 올라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속도로 뛰쳐나간다. 머리장식이 귓가에서 잘랑인다. 그러니까 이건 아주 당연한 사랑의 이야기다.

quote 발췌

2022.09.19 22:01 # reply

무용수들아, 발맞추어 춤을 추어라, 아버지의 더없는 행복을 축복하여, 우리의 이 춤은 성스러운 춤 그렇다면 아폴론이여, 월계수 우거진 성역에 그대의 무녀의 혼례를 축복하여 스스로 춤을 다스리소서. 오, 히메나이오스, 어머니도 일어나 춤을 추세요.

《그리스 비극》 462p 트로이의 여인들

 

 

비극이 누구에게서 유래했으며 어떠한 변화 과정을 거쳤는지 잘 알려져 있는 반면, 희극은 그렇지 않은 까닭은 처음에는 아무도 희극을 진지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학》24p

피드백

2022.09.18 17: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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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02

2022.09.02 01: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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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29

2022.08.29 22:57 # reply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은 자신을 우선시하고 종을 퍼트려 유전자로 남는다. 살아남는다. 움직인다. 그러나 사랑은 본능적 이기를 억제하고 마침내 다르게 태어나 함께 죽기를 원한다. 자신을 살해하는 호르몬에 무방비하게 노출된다. 우리는 살인을 사랑이라고 말한다.

2019년 썰계 백업

quote 220827

2022.08.27 01:21 # reply

‘죽음이란 언제나 죽음일 뿐이다. 그런데도 인간은 저마다 자기 특유의 방식으로 죽는다(Death is always the same, but each man dies in his own way).’

카슨 맥클러스, <바늘 없는 시계>

220826

2022.08.26 20: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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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리사 소워비

2022.08.25 00: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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