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ɴ
   

2023.12.06 13:14 # reply

 

 

창백하고 턱이 뾰족한 얼굴, 초연하게 타인의 손목을 잘라내는 손짓을 보고 있으면 알 수 없는 충동이 끓었다. 제정신이 아니라니까, 하고 들려오는 타박도 새삼스럽지 않다는 듯 웃어 넘겼다. 글쎄, 어쩌면 지극히 제정신이라 가능한 판단일지도 모르지. 태연자약하게 대꾸하면 이해하기 어렵다는 시선이 돌아왔다. 잘 닦인 도구잖아? 그런 걸 쓸모없게 만들어버리는 게 즐거운 거라고. 그 후에 주워다 다시 한 번 벼려서…

 

쓸모를 찾는 거지.

 

 

*

 

 

불야성의 거리는 연기처럼 몰려드는 사람으로 매캐했다. 네온사인의 빛을 피해 들끓는 쥐새끼들과 계절에 맞지 않는 차림새로 눈이 풀린 중독자들, 그 중에도 악질은 머리와 몸통, 꼬리를 완성하며 몇날 며칠을 자리에서 비킬 줄 모르는 도박쟁이들이다. 오늘도 거리의 정경은 크게 다르지 않다. 


"타오."

"링쥔, 여기까지 온 거야? 대범하네."

"타오가 이거, 필요하다고 해서."

 

사람의 틈을 간신히 비집고 들어온 여자애가 내민 것은 손질이 끝난 장도 한 자루였다. 본디 두 자루가 한 쌍인데, 까닭이 있어 대장간에 맡긴 것을 링쥔이 찾아온 것이다. 사람에게 휩쓸려 얼굴 가장자리를 따라 까만 머리카락이 들러붙어 있었다. 타오옌은 주머니에서 담배곽 하나를 꺼내 건네주었다. 링쥔의 눈이 반짝였다.

 

"어디 갖다주는지 알지?"

"응. 고기 살 거야."
"슌에게 먹이려고?"

"샤오슌, 더 커야 하니까."

"다 컸네, 링쥔. 이제 타오는 필요 없지?"

 

그게 아니라고 화들짝 놀라 머리 젓는 아이의 어깨를 떠민다. 알겠으니 얼른 돌아가, 곧 사냥이 시작된다. 뱀의 속삭임 같은 목소리에 멍해졌던 링쥔은 담배곽을 꼭 쥐고 도로 인파로 뛰어들었다. 물결은 흘러흘러 어디를 향하나, 한 자루를 마저 허리에 차며 남자가 걸음을 옮겼다. 장강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내니… 읊조리는 말은 호기로웠으나 흔들리는 긴 머리타래도 사람의 틈새로 사라진다.

 

 

*

 

 

모래톱 여울에 스러진 앞물결을 애도하는가?

남자는 타인을 애도할 줄 모르는 인간은 아니었으나, 필요에 따라 간극을 조정할 줄 아는 인간이었다. 휴대전화 너머로는 주 선생의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걸음이 이어진다. 바닥에 쓰러진 사람의 어깨를 발로 툭 밀어 얼굴에 드리운 죽음을 확인한다. 리정이군. 타오옌은 그의 동생을 잘 알았다. 제 형과 단단히 틀어져 경찰 나으리로 사느라 바빴다.

"…이봐, 타오옌. 듣고 있는 건가? 반드시 11시 25분까지는 나와야 해… 더 늦어지면 아무리 나라도 무리야."

"알겠다고 몇 번을 말해야 아는 거야. 옆에 하이옌이지? 떽떽거리는 게 똑같다."

 

곧바로 날카로운 목소리가 자리를 교대했다.

"알면 제때 집에 좀 들어와. 작작 쏘다니라고. 언제까지 뒤나 봐줘야겠어?"

"누가 봐달랬나. 자청해서 일 맡는 것도 재주야."

"진짜 짜증나!"

"걱정해줘서 눈물겹다. 이만 끊어!"

 

여동생을 실컷 놀린 타오옌도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숨을 돌렸다. 슌에게 온 문자를 확인하자 이후의 길을 안내하고 있었다. 사람을 안내자로 들이기엔 못 미더운 게 많다던가. 불확실성을 이야기했던 것도 같다. 어찌되었든 좋다. 아슌은 이제껏 일을 틀린 적이 없었으니까. 링쥔이 걱정하는 그 이상으로, 아슌은 탁월한 중재자였다. 야광으로 빛나는 페인트를 따라 걷는다. 어리고 병약하지만 그렇다고 누구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 아슌이 협조한 일이다. 내일부터 성채는 한 쪽 모서리를 잃고 무너져 내릴 것이다. 많은 이가 오래도록 염원해온 순간이었다. 혹은 그렇게 시늉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자신만이 잘 해내면 되는 일. 따라서,

 

작은 도살자를 마주친 것은 필연이다.

 

 

*

 

人生無根蒂

뿌리 없이 살아가는 사람아

飄如陌上塵

길 위의 먼지마냥 떠도는데

分散逐風轉

흩어져 바람에 맴도는 탓에

此已非常身

이 몸도 과거의 내가 아니네

 

 

*

 

 

옛날엔… 호간이라는 조직의 일원이었다는 소문이 들렸다. 서로를 애도하고 섧게 여긴다지. 어떤 소문은 믿을 것이 되지 못했지만, 적어도 창백한 낯을 보자면 그리 틀렸다고 느껴지지는 않았다. 칼과 칼이 맞닿아 튄 불똥이 희미하게 눈을 비추었다. 남자는 건너편의 눈에서 오래된 절망과 무기질 같은 분노를 본다. 썩 좋은 방식으로 여기 뿌리 뻗지는 못했음을 알았다. 타오옌은 그런 족속들의 균형을 깨트리는 법도 잘 알았다. 이젠 여기밖에 없다고 믿겠지, 잃은 것을 품고 있겠지. 그러면서도 간절히 지킨 모든 가치를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 때, 그들은 분노하고 무너진다. 

 

몇 번이고 배신해. 살아남는 것보다 중요한 게 있어? 아니면 뭘 애도하나?

닥쳐라. 그 가치를 네놈 따위가 알 턱 없지.

좋은 의사를 알려줄 테니 예민하게 반응하진 마. 아니지, 필요한 건 고철상 쪽이려나.

 

이어지는 조롱에 날카로운 칼날이 달려든다. 그러나 직전과는 달리 전혀 계산되지 못한 움직임이다. 그 자리 말야, 다른 놈은 거기 없었을 것 같아? 물론 생존을 위해 수거되어 가치를 증명해야 했던 여자는 아주 잘 알고 있다. 모래톱에 부딪히지 않으려, 밀려나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버텨야 하던 나날, 무정함을 겉에 두르고 무엇 하나 마음에 들이지 않아야 했던 매 초를. 그러나 허점을 찔러오는 칼날이 매서웠다. 불꽃처럼 쏟아지는 난무는 처참하다. 오래도록 외면했던 고통이 스쳐온다.

 

"언제까지 고여 있으려고."

"네놈이 뭘 알아…!"

"네가 자른 손목의 주인들은 잘 알지. 단순한 도박이 아니었잖아… 알고 있었지?"
 

그가 속삭인다. 살기 위해 했던 것들이야. 넌 그걸 외면했어. 손목을 베어내고 죄를 물었지. 하지만. 시체 같은 여자를 향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잘 벼려진 채다. 정말로 죄를 물어야 했던 건 그 남자 쪽이야. 리웨이가 왜 리정을 두고 갔는지 넌 모르잖아. 주 선생이 어쩌다 며느리와 손자를 모두 잃었는지도 모르잖아. 마약을 값싸게 유통시킨 건 어느 쪽이지? 돈의 가치를 몰락시킨 건? 사람으로 남기 위해 팔지 말아야 하는 것까지 팔아넘기게 만든 건 누가 내린 결정이었다고 생각해.

 

드리운 낚시 바늘들, 단 하나라도 걸리면 그대로 현실에 내동댕이쳐지고 만다. 쏟아지는 위협에 거리를 벌리고 타오르는 검은 눈을 노려본다. 이미 잃어버린 것 투성이다. 저런 말에 무너질 수는, 목적을 잃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뱀이 발목을 기어오른다.

 

 

*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엇 하나 마음에 들일 여유가 없었다. 틈새를 비집고 드는 것은 모조리 피비린내가 났다. 눈을 마주치면 간절한 애원이 스며들었으나 외면해야만 했다. 그렇다면 흰 뼈와 붉은 살의 단면이 차라리 나았다. 그러나 저 목소리는 멈추지 않고 그의 마음을 헤집어 놓았다. 리정이고 리웨이고 모르는 이름 뿐, 주 선생의 며느리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그 손자의 눈을 본 적도 없다. 어둠 속에서 나타난 남자의 목을 저며버리면 아주 조용해질 것인가, 이 술렁이는 심장의 맥박을 가라앉힐 수 있는가? 이 피투성이의 현장에서, 책임자는 대체 누가 될 것인지조차 알 수 없다. 손가락, 검을 쥔 손가락이 시야에 들어온다. 온전하지 못하다. 이미 오래 전 잃어버렸다. 완전함이라고는… 뿌리내렸던 결속을 잃어버린 그 끝은 이렇다. 간절하게 놈의 목을 겨냥해도 오히려 그것을 예측했다는 듯 칼날을 쳐낸다. 불똥이 튀고 날카로운 파공음이 스친다. 제발 죽어, 죽어줘, 그만 나를 뒤흔들어… 한 조각 비명도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맹목적으로 오랜 시간 몸에 습득한 행동만을 반복한다. 이조차도 잃은 과거의 흔적이다. 균형을 잃고 호흡을 가다듬지 못했던 대가로 숨이 희미하게 차기 시작했다. 

 

"슬슬 끝낼 때야."

 

대답하지 않아도 남자는 계속 지껄인다. 맞대응해 체력을 고갈하는 대신 물리적 저항을 지속한다. 남자가 꺼내든 양손의 장검 사이로 교묘하게 그의 칼날을 붙잡는다. 속삭임이 이어진다. 경찰이 오고 있거든. 증거와 함께 고발이 접수되었어. 네 이름으로.

 

불현듯 고개를 든다. 검은 눈이 웃고 있다.

 

"이, 개자식이…!"

"그렇게 말하면 섭해. 대가를 치뤄야지, 무쿠로."

 

기어코 이름이 불린다.

인간으로 살아남기를 포기하고, 한 마리 번견이 되는 까닭에 외면했던 것이.

 

여자는 끝을 직감했다.

 

 

*

 

 

바깥에서는 사이렌 소리가 시끄러웠다. 남자가 가까스로 몸을 빼낸 것은 11시 25분을 조금 넘긴 때였다. 본래 그 전에 돌입해야 했던 특임대였으나, 근처에서 환자를 수송하기 위해 이동하던 소방차와 약간의 문제가 생겨 무법자처럼 돌진할 수 없었다. 뭐, 차를 두고 올 순 없었겠지. 안에서 장비를 갖춰야 하니까. 남자는 건물에서 빠져나와, 골목 틈새에서 몰락의 정경을 지켜본다.

 

"이럴 줄 알았지, 주 선생은 다 방도가 있다고."

 

어깨 위에선 너덜거려 반쯤 시체 같은 여자가 매무새 맞지 않는 큰 겉옷에 감싸인 채 꿈틀거린다. 마지막 칼날이 목을 스쳤던 탓에 따끔했다. 냅다 이마를 들이박아 머리도 징징 울렸다. 그러나 남은 상처에도 불구하고 승리는 그의 손에 쥐어졌다. 무정한 리웨이의 얼굴이 언뜻 보인다. 냉혹하게 지휘하고, 특임대가 건물 안으로 진입한다. 저기 남아있었더라면 단단히 큰 낭패를 보았을 것이다. 휴대폰을 꺼내 확인하자 부재중 전화가 여러 통 찍혀 있었다. 때마침 주 선생에게서 다시 전화가 걸려오고 있었다. 받자마자 요란한 목소리가 뒤섞여 귀가 쨍할 지경이었다.

 

"무사하니까 그만 해."

"자네는 매번… 무리라고 했질 않나, 대체 언제까지 이 노인네 간을 졸이려는 게야."

"그래도 손 써줬잖아?"

"그건 샤오슌의 솜씨네. 나중에 병문안 잊지 말고."

"뭐야, 잠깐만. 슌이 직접 갔어? 이건 예상 못 했는데."

"링쥔이 자넬 지나치게 걱정했어."

 

타오옌이 짧게 웃는다. 빌딩 한 층 한 층을 올라가며 한계를 초과한 손전등의 광량이 유리에 부딪힌다. 빛으로 깎아낸 조각상이 있다면 저런 꼴일까. 불이라도 난 듯한 모습이었다.

 

"링쥔도 한동안 심부름 그만 하라고 해. 위험하다."
"아는 놈이 그렇게 부려먹나."

"하하, 나는 부려먹은 게 아니지… 링쥔이 호의를 보여주는 것뿐이잖아."

"링쥔의 보호자가 누구였는지 알면서."

"글쎄, 모르겠는데."

 

건너편에선 마음대로 하라는 듯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참, 리웨이를 봤어."

"…건강해 보이나?"

"깡패놈들 대가리 깨는 건 자신있어 보이던데?"

"쯧……."

 

무사히 들어오기나 하게, 주 선생의 말을 마지막으로 통화는 종료되었다. 코 끝이 시린 어두운 밤, 별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이 도시는 이미 병들었고, 서로 썩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가장 큰 기둥부터 불질러 마땅하지 않겠는가. 어지러운 걸음이 이어진다. 이 다음은 리웨이가 잘 해줄 것이다. 세상이 그것을 원할 것이다. 그가 원치 않더라도. 단순히 형제에 대한 일말의 동정, 혹은 의협심, 혹은 증오만이 남아있더라도.

 

 

타오옌에게 남은 것은 여자의 처분이었다. 이미 적절한 계획을 꾸려두었다. 소문 속에서 푸른 머리를 가진 여자는 결국 복수심을 잊지 못하고 조직을 거꾸러뜨린 채 이 도시의 음지로 숨어들게 될 것이다. 경찰들은 여자를 쫓고, 수배전단을 뿌리겠지. 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보증이 된다. 잔악한 탄압에도, 추악한 명령에도 굴하지 않았다는 증거, 그러나 이제껏 보인 잔혹한 손속으로 인해 외로울 수밖에 없겠지. 너무나 많은 이해관계가 여자를 둘러싸고 있었다.

 

타오옌은 이 여자를 붙잡아줄 수 있는 것이 오직 자신 뿐인 것을 안다. 직접 마주하지 않는 한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러나 누구도 직접 마주하려 하지 않는다. 공포와 불안의 대상일 것이다. 살아가는 한 괴로울 것이다. 고독할 것이다. 외면할 수 없을 것이다. 바로 그 불행이 그가 안배한 선물이다. 행복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이상 불행해지지 않기 위해서… 돌아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전히 빌딩의 유리 너머로 빛이 물결처럼 쏟아지고 있다.

 

"하루에 새벽은 두 번 오질 않으니… 제 때 살아가야지 않겠어."

 

남자는 다시 걸음을 옮긴다. 도시의 깊은 어둠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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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반부의 '장강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내니' / '모래톱 여울에 스러진 앞물결을 애도하는가?' 문장은 명 말 격언집, '증관현문'의 장강후랑추전랑長江後浪推前浪에서 유래한 현대 격언을 참고하였음을 알림

* 중간의 시와 마지막 대사는 도연명陶渊明의 잡시십이수기일杂诗十二首其一 (전문 : 人生無根蒂/飄如陌上塵/分散逐風轉/此已非常身/落地爲兄弟/何必骨肉親/得歡當作樂/斗酒聚比鄰/盛年不重來/一日難再晨/及時當勉勵/歲月不待人) 을 참조하였음을 알림